2008년 9월 미국발(發) 금융위기로 국내 금융기관과 중소기업에 ‘키코 대란(大亂)’이 터졌다. 키코는 기업이 환율 변동에 따른 손실을 예방하기 위해 은행과 계약하는 통화옵션 상품이다. 환율이 일정 범위 안에서 움직이면 별 문제가 없지만 범위 위로 치솟으면 기업이 큰 손실을 입는다. 원-달러 환율은 2007년 달러당 평균 934원에서 2008년 9월 장중 1600원까지 급등했다. 키코 거래 기업들은 평균 100억 원에 가까운 손실을 입었고 일부는 부도를 내거나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100여 개의 피해 기업은 은행과 민사소송을 진행 중이다. 검찰은 이들 기업이 한국씨티, 외환, SC제일, 신한 등 4개 은행을 사기 혐의로 고발한 사건에 대해 수사를 시작했다. 2월에 나온 민사소송의 첫 판결은 은행 측 손을 들어주었다. 키코가 은행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상품이 아니므로 부당한 거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키코의 승소(勝訴)는 은행에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 금융연구원 김병연 선임연구위원은 보고서를 통해 “금융 분쟁에서 소비자의 패소가 늘어나면 소비자의 금융상품 불신이 커진다”고 지적했다.
은행들이 키코 소송에서 완승을 거두어 거래 기업들이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면 앞으로 키코는 물론이고 다른 파생상품의 거래도 위축될 가능성이 높다. 일본에서는 1990년대 소비자들의 패소가 많았던 변액(變額)보험의 인기가 시들해져 판매가 중단됐고 이것이 보험산업 장기침체의 큰 원인이 됐다.
키코는 상황이 급변하면 소비자가 큰 손해를 입을 수 있는 상품인데도 은행들은 보완장치를 마련하지 않았다. 금융기관은 자신들이 법규 위반을 피해갈 수 있을 정도로만 상품 설명을 해서는 안 된다. 소비자가 착오를 한 경우에도 충분히 알려주는 게 진정한 소비자 보호다. 독일의 보험계약법은 소비자를 계도하는 의무, 소비자가 알기 어려운 법률적 결과를 알려줄 의무까지 금융기관에 지운다.
선진국들은 금융 소비자를 보호하는 특별법을 갖추고 있다. 금융기관들은 현행법에 어긋나지 않았다는 판결에 안주하지 말고 소비자보호 의식을 스스로 높여야 한다. 중소기업들에 키코 대란의 비용을 부담시켜 막대한 타격을 주고도 소비자보호에 무신경하다면 당국이 감독 강화와 특별법 도입으로 은행을 정신 차리게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