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6년 전인 것 같다. 선배를 따라 길상사로 갔다. 그곳에서 뵌 법정 스님의 첫인상은 대꼬챙이였다. 꼬장꼬장하고 빈틈이 없어 범접하기 힘들었다. 다소곳이 앉아 스님이 손수 우려낸 차만 마셨다. 문무의 고수(高手)는 원래 글자랑 힘자랑을 않는 법. 스님은 선배와 다방 한담만 나눴다. 마음이 놓였다. 차츰 스님에게서 맑고 따뜻한 기운과 다향이 느껴졌다.
썩지 않을 가르침 남기신 두 분
그즈음 후배가 어느 자리에서 한마디 던졌다. “(용기를 내어)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자신의 화두라고 했다. 스님이 편저한 책에 나온다고 했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사상가 폴 발레리의 말이었다. 듣는 순간엔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러나 헤어져 집으로 가는 길에 되씹어 보니 섬뜩했다. 자칫 베일 수 있는, 날이 시퍼렇게 선 화두였다. 얼마 후 그 후배는 회사를 떠났다.
스님의 법구(法柩)를 불사르던 13일, 기자는 눈 덮인 치악산에 있었다. 구룡사 입구에서 호랑이 가죽 무늬를 한 금강소나무를 보았다. 하늘 높이 솟은 그 모습은 생사여일(生死如一) 무소유를 실천한 스님의 현신(現身)인가. 터벅터벅 산을 오르는 동안 계곡 아래선 물소리가 들린다. 내려다보니 눈 녹은 물이 쉴 새 없이 흐른다. 맑고 깨끗하게 살다 간 스님이 생각났다. 눈시울이 잠시 아릿해졌다.
구룡사 일주문 두 기둥엔 ‘천겁이 지나도 낡지 말고(歷千劫而不古), 만년 동안 항상 오늘같이 길이 남으라(恒萬歲以長今)’고 적혀 있다. 스님의 무소유 정신도 천년만년 길이 남기를 두 손 모아 빈다. 눈을 돌리니 앙상한 나무가 보인다. 가지를 넣으면 물이 파랗게 된다는 물푸레나무다. 그러고 보니 스님은 우뚝 솟은 적송(赤松)이 아니다. 낮은 곳에서 자신을 꺾어 탁한 기운을 정화하는 가녀린 물푸레나무다.
험한 사다리 병창을 넘어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쯤 정상(비로봉·1288m)에 섰다. 사방이 수묵화처럼 거뭇거뭇한 연봉들로 꿈틀거렸다. “저기가 오대산이다.” 누군가 동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세상을 피해 스님이 기거했던 화전민 오두막이 있는 곳이다. 스님은 지난해 2월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을 조문하지 못했다. 그때 이곳에서 아픈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 한 길이나 쌓인 눈 때문에 몸이 성했어도 못 갔을지 모른다.
대신 글로 조문했다. “나와 만난 자리에서 그분은 ‘다시 태어나면 추기경 같은 직책은 맡고 싶지 않다. 그냥 평신도로서 살아가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하심(下心),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의 실천자임을 느낄 수 있었다. 하느님을 말하는 이가 있고, 하느님을 느끼게 하는 이가 있다. 하느님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지만, 그 존재로써 지금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있음을 영혼으로 감지하게 하는 이가 있다. 우리는 지금 그러한 이를 잃은 슬픔에 젖어 있다. 그 빈자리가 너무 크다….”
다시 만나 반갑게 인사 나누셨나요
생전에 바보 추기경은 길상사 법회에 갔고, 비구(比丘) 법정은 명동성당 미사에 왔다. 두 사람은 “더 단순해지고, 더 온전해지라. 사랑은 단순한 것이다”라고 세상에 말했다. 높은 곳에서 내려와 약하고 억눌린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애써 다가왔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歸天)’고 노래한 천진무구(天眞無垢)의 시인 천상병 같은 사람들을 사랑했다.
며칠 전까지 내 컴퓨터를 켜면 추기경이 그린 바보 자화상이 떴다. 1년 스무하루 만에 이 바탕화면을 스님의 흑백사진으로 바꿨다. 두 분 역시 인간인지라 숨을 거두기 전 육신의 지독한 고통에 시달렸다. “어서 오세요.” 먼저 하늘나라로 간 추기경님이 스님을 반기는 소리가 허공에서 들리는 것만 같다. 스님의 49재가 지나면 몇 년 전 성당에서 두 분이 손을 맞잡았던 사진을 올려놓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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