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 창업자인 정주영 회장은 생전에 사장단 회의를 할 때 세 가지를 꼭 챙겼다고 한다. 첫째는 각 계열사의 수출 실적, 두 번째가 국산화 진척도, 세 번째가 직원들의 저축률이었다. 그는 “우리나라는 수출로 먹고살아야 한다”며 “밖에서 벌어서 안을 살찌운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기술 자립을 위해 국산화를 강조했다.
가장 특이한 점은 직원들의 저축률을 보고하게 한 것. 지금 같으면 회사가 그런 일까지 관여하느냐는 논란이 일겠지만, 아무튼 정 회장은 당시 직급에 따라 월급의 몇 퍼센트씩을 저축하도록 했다. 그 덕분에 현대그룹 임직원들은 저축을 많이 했고, 회사가 앞장서 주택조합을 만들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집을 살 기회도 많았다고 한다.
정 회장이 한창 활동하던 1970, 80년대는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연평균 10% 안팎으로 고도성장하던 시기였다. 전태일의 분신이나 YH여공 사건처럼 ‘산업화의 그늘’도 있었지만 수출이 늘고 기업이 커가면서 중산층도 불어났다.
그때는 ‘밖에서 벌어서 안을 살찌우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기업은 수출로 벌어들인 돈으로 투자를 하고, 그러면 고용과 소비가 늘어나 다시 기업이 돈을 버는 선순환이 이뤄졌다. 나라 경제와, 기업의 성장과, 국민의 살림살이가 같이 움직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연결고리가 끊어져버렸다. 이젠 기업이 돈을 많이 벌어도 국민의 생활형편은 별로 나아지지 않는다.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한 재작년과 작년에도 국내 대기업들은 놀랄 만한 실적을 냈다. 삼성전자가 국내 기업으로는 처음 지난해 100조 원 이상 매출, 10조 원 영업이익을 달성했고 현대자동차는 사상 처음으로 세계 시장 점유율 5%를 돌파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일자리가 줄어들고 소득 양극화가 심해졌다. 우리나라 가구 중에서 중산층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3년 70.1%에서 지난해 66.7%로 줄었다. 지난달 청년실업률은 10.0%로 1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가계는 여윳돈을 저축하고 기업은 이 돈을 대출받아 투자하는 전통적 역할마저 흔들렸다. 가계는 빚이 많아 저축을 못하는데, 기업은 돈이 많아도 투자를 하지 않고 은행에 쌓아두고 있다.
국민과 가계가 가난해지면 기업들은 기댈 곳이 없어진다는 사실은 일본의 장기침체나 최근 미국의 불황에서 알 수 있다. 중산층이 튼튼하고 가계에 여유자금이 있어야 어려울 때 기업의 소비시장이 되고, 자금줄이 될 수 있다.
한때 기업에는 국적이 없다고 하여 ‘다국적 기업’이라는 말도 유행했지만 이번 경제위기 로 한계를 드러냈다. 제너럴모터스(GM)에 미국 정부가 돈을 쏟아 붓고, 도요타 리콜 사태에 미국인들이 유독 민감하게 들고일어난 것은 기업에도 국적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한국 기업들은 지금도 사회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매년 많은 돈을 기부하고 일자리 나누기에도 동참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기여가 ‘충분하다’고 하기엔 현재 우리나라의 중산층 감소와 성장잠재력 훼손이 매우 심각하다.
기업들은 당장의 경영효율을 위해 사람을 자르기에 앞서 직원의 가치를 높이려고 애썼는지, 해외에 공장을 짓기 전에 국내에서 생산할 방법은 없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또 납품가를 낮추기에 앞서 협력업체의 수준을 높여 상생하려고 했는지, 저출산 같은 사회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우리 기업들이 한번 돌아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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