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美‘건보 개혁 입법’이 보여준 성숙한 민주주의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3월 23일 03시 00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정치적 명운을 걸고 추진한 건강보험 개혁 법안이 작년 12월 상원에 이어 그제 하원에서도 통과함으로써 사실상 성립됐다. 1912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서 비롯된 전 국민 건강보험제도 도입은 역대 대통령들이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막대한 재정 부담, 계층 간 이해갈등, 이념적 논란으로 번번이 무산됐다. 미국은 건보 개혁 입법에 성공함으로써 선진국 중에서 유일하게 전 국민 건강보험이 없는 나라라는 오명을 벗고 3200만 명이 건강보험 혜택을 추가로 받게 됐다.

2008년 대선 당시 건보 개혁을 최대공약으로 내건 오바마 대통령은 작년 1월 취임 이후 건보 개혁 법제화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는 여야 합의로 건보 개혁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적진’이라 할 공화당 의원들의 연수회에 참석하고 공화당 의원들을 백악관으로 초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외국 순방 일정을 연기하며 대통령 전용기에 야당 의원들을 동승시켜 설득했다. 그는 폭스뉴스를 “보수 세력의 나팔수”라고 비판했지만 건보 개혁을 위해 이 TV와의 인터뷰도 마다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야당의 지지를 끌어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야당과 국민을 설득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점만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오바마 대통령은 반드시 실현해야 한다고 믿은 개혁을 중간선거 및 다음 대선에서의 정치적 패배까지 각오하고 관철해냈다. 그는 이번 건보 개혁 때문에 보수층은 물론이고 일부 진보층의 지지도 잃을지 모르지만, 미국의 최대 난제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 눈앞의 정치적 이익을 포기할 수 있다는 자세를 분명히 했다. 1월에는 단임 대통령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건보 개혁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야당인 공화당은 상하 양원에서 모두 소수파이지만 법안 심사나 표결 때 물리적 저지나 외부세력과 연계한 장외투쟁 같은 일은 벌이지 않았다. 의회민주주의 절차를 존중해 수차례 법안을 수정하고 표결 결과에 승복함으로써 절차적 민주주의를 살리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줬다. 우리 정치권은 왜 이런 모습은 본받지 않는지 궁금하다.

오바마 대통령 취임 이후 백악관과 미 의회의 최우선 현안이 건보 개혁이어서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제외한 다른 국제 사안은 미국 정치의 후순위로 밀리는 듯했다. 이제 건보 개혁이 마무리돼 미국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북핵 같은 중요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줄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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