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가끔 절에 간다. 일요일 출근 때문에 법회에 매주 참석하진 못해도 법당에 들어서면 꼭 108배를 드린다. 절대자 앞에 몸을 던지면 나 자신이 태아로 돌아간 것처럼 한없이 쪼그라드는 느낌을 받는다. 이 느낌이 좋다. 몸을 낮추고 이마를 바닥에 닿게 하는 배례(拜禮)를 통해 평안을 느끼고 겸손도 배운다. 그래서 어떤 종교든, 그곳에는 자신이 보잘것없음을 인정하게 하고 나아가 그것을 넘어서게 해주는 커다란 무엇이 있다고 믿는다.
이 믿음은 종교인에 대한 기대로 이어지지만, 정치와 종교의 갈등을 보면 종교가 마냥 현실을 초월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특히 요즘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 김영국 씨가 벌이는 진실 공방이 그렇다.
조계종이 봉은사를 직영 사찰로 하겠다고 하자 명진 스님은 21일 일요법회에서 안 원내대표가 ‘강남 부자 절(봉은사)의 좌파 주지를 그냥 둘 것이냐’고 자승 총무원장에게 물었다고 폭로했다. 이 말은 자승 스님과 안 원내대표와 함께 있었던 김 씨가 명진 스님에게 전했다. 안 원내대표가 그런 일 없다고 펄쩍 뛰자, 명진 스님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거짓말한다”고 되받았다. 김 씨도 기자회견을 열어 “명진 스님의 말이 맞다”고 확인했다. 그 사이 조계종은 기자들에게 “외압은 없었다”고 거듭 밝혔다. 김 씨는 한나라당 부대변인 출신으로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명진 스님 등과 친분이 깊은 불교통이다.
이 진실 공방이 어떻게 끝날지 모르겠지만, 안 원내대표가 그런 말을 했는지와 조계종이 그 말 때문에 봉은사를 직영으로 했는지는 크게 다른 문제여서 몇 고비는 넘겨야 할 것 같다. 이미 명진 스님은 “자승 총무원장과 정치권이 얼마나 가까운지는 다음 주(28일)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자”며 충격 발언을 예고했다. 정치권도 각각의 득실에 따라 이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다.
기자에게는 무엇보다 이번 사태가 불가의 다툼도 속가의 그것과 같다는 사실을 보여줬다는 게 안타깝다. 조계종단 내부에서 소통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 격정과 분노가 걸러지지 않은 명진 스님의 발언 등이 기자가 기대하는 불가와 달랐다. 이제 자승 총무원장은 종단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취임한 지 4개월 만에 곤욕을 겪고 있다. 명진 스님도 말 많았던 절을 수행 도량으로 바로잡았다는 명성에 흠집이 생겼다.
천주교 주교회의가 4대강 사업에 우려를 표명한 것도 ‘사실상 반대’로 해석되면서 후폭풍이 거세다. 주교회의의 결정은 천주교가 지속해 온 생명과 환경운동에 대한 신념의 표현이지만, 찬반이 양립하는 대형 국책사업에 교단의 이름으로 단일 의견을 내놓는 게 이례적이었다. 결국 이 결정도 정치권이 자기식대로 해석하면서 갈등의 소지가 되고 있다. 일부 기독교인들도 부활절 전날(4월 3일)에 4대강 반대 선언을 할 것이라고 했다. 이런 식이라면 4대강 사업은 지방선거가 가까워질수록 정치 쟁점이 될 것이다. 종교는 본의 아니게 그 촉매 역할을 한 셈이다. 이럴 때 종교가 얼마나 제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
현실 문제를 종교가 외면할 순 없다. 하지만 종교의 사회 참여와 발언에는 감히 정치판이 범접할 수 없는, 속세와 구분되는 종교 본연의 방식이 있을 듯하다. 영혼에 호소하고 갈등마저 싸안아 통합을 이룰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종교는 위엄을 잃고 위세만 남을 뿐이다. 종교에 기대를 가진 기자에겐 걱정이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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