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현두]本末顚倒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4월 7일 03시 00분


사교육과의 전쟁을 선포한 정부의 전선(戰線)이 경시대회까지 확대됐다. 교육과학기술부가 경시대회 수상 실적을 학교생활기록부에 적지 못하게 함에 따라 경시대회는 생사의 기로에 몰리게 됐다. 과학고 외국어고 등 특수목적고와 대학들이 입시에서 학교생활기록부의 비중을 갈수록 늘려가고 있는 만큼 경시대회의 몰락을 점치는 이도 있다. 하지만 수준별 학교 수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경시대회 폐지가 사고력과 창의력이 뛰어난 인재의 발굴과 육성을 가로막을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과연 그럴까. 지난해 수학경시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한 한 고등학생은 “시험을 앞두고 1만여 개의 문제를 풀면서 다양한 문제 유형을 익힌 것이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대학 입시 서적의 베스트셀러인 ‘수학의 정석’을 펴낸 홍성대 상산고 이사장은 지난해 말 사석에서 “현재 학생들이 공부하는 수학은 수학이 아니다”라고 일갈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수리 영역 30문제를 푸는 데 배정된 시간은 100분이다. 홍 이사장은 “모든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3분에 한 문제씩 풀어야 하는데 문제를 보고 사고하고 궁리할 시간이 어디 있느냐”며 “수학도 암기 과목이 돼 가고 있는 것”이라고 한탄했다.

수학마저 이 지경인데 다른 과목은 말해 뭐하겠는가. 최근 안병만 교과부 장관이 “EBS 강의에서 수능 문제의 70%를 출제하겠다”고 발표한 뒤 폭증하고 있는 EBS 수능 강의 접속자 수가 그 방증이다. 정부 스스로 출제 범위를 정해주고 학생들에게 암기와 찍기 공부를 하라고 유도하는 상황에서 창의력 교육을 운운하는 것은 바보짓일 뿐이다.

그럼에도 안 장관은 최근 “입학사정관 전형을 전체 정원의 20%까지 늘리겠다”고 밝혔다. 정부의 표현을 빌리자면 입학사정관제는 교과 성적보다는 학생의 창의력과 잠재력을 더 중요시하는 입시 전형이다. 정부의 강력한 드라이브로 2009학년도에 4555명이었던 입학사정관제 전형 합격생은 2010학년도에는 네 배가 넘는 2만4622명으로 증가했다.

2009학년도 기준 전국 4년제 대학의 입학 정원은 34만9000여 명으로 전체 수능 응시생의 절반을 조금 넘었다. 안 장관의 말대로라면 대학들은 매년 적어도 창의력과 잠재력이 있어 입학사정관이 선발할 학생 6만8000여 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 지난 입시에서 대학들은 소위 창의력 있는 학생을 찾느라 한바탕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고교들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대학 입학처장들과 고교 입시 담당 교사들 모두 “암기 위주의 교육이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중고교를 거친 학생들에게서 창의력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라고 입을 모았다. 학생과 학부모들이 느끼는 곤혹스러움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 틈을 놓칠 리 없는 사교육 업체들은 창의력을 ‘스펙’으로 둔갑시켰고 불쌍한 학생과 학부모들은 스펙 쌓기 경쟁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입학사정관제를 확대하지 않는 대학에는 불이익을 주겠다는 협박을 공공연하게 하고 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것이다. 콩을 얻고 싶으면 콩을 먼저 심는 것이 우선이다. 또 콩을 수확할 때까지 보살피면서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 학생들의 창의력도 똑같다. 하지만 암기 위주의 중고교 교육을 개선하려는 정책이 나왔다는 말은 여전히 들리지 않고 있다.

이현두 교육복지부 차장 ruch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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