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동원]우리 곁의 멜팅폿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4월 21일 03시 00분


서울 도심에서 삼청각을 거쳐 성북동 쌍다리를 지나면 언덕길에 꽤 오래된 덕수교회가 보인다. 가까이 길상사가 있어 법정 스님 추모객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는 곳이다. 이 교회당 앞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동(洞)사무소가 있었다.

최근 이곳엔 작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동사무소 통폐합 정책에 따라 쓸모가 없어진 건물이 말끔하게 단장돼 지난해 11월 말 다문화(多文化) 소통공간인 ‘다문화빌리지센터’로 탈바꿈한 것.

다문화센터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궁금해 찾아 가봤다. 성곽탐방길 등 주변에 명소가 적지 않아 이곳을 찾는 외국인들의 발길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호기심 어린 표정들이었다.

초대 센터장인 독일 출신 한스 알렉산더 크나이더 교수(한국외국어대)는 “이곳은 34개국 대사관저가 몰려 있어 다문화 소통공간으로서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라며 “외국인과 한국인이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명소로 키워 나갈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한국에서 13년을 살았다는 그는 최근 이 센터가 입소문을 타면서 줄잡아 2000여 명의 외국인이 찾았다고 귀띔했다.

돌연 10여 년 전 뉴욕이 겹쳐졌다. 여덟달 동안 뉴욕에서 지낼 때 경험했던 매력만점의 한 단체가 떠올랐던 것. 현지 지인들이 며칠이 아니라 몇 달을 살 거라면 꼭 가보라고 권한 곳이다.

바로 맨해튼 20번가(街)쯤에 있던 ‘인터내셔널센터 뉴욕’이었다.

세계 곳곳에서 뉴욕을 찾아온 외국인들에게 영어는 물론 뉴욕의 문화를 자연스레 접하도록 이끄는 비영리 단체다. 한번 이곳을 찾으면 서너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했다. 자원봉사에 나선 현지 뉴요커와 이곳을 찾아온 외국인들을 몇 가지 조건을 고려해 짝(파트너)을 맺어준다. 파트너와 시간이 맞으면 언제라도 이방인의 영어 실력에 적합한 일대일 맞춤식 영어도 배운다.

호흡이 잘 맞으면 파트너와 함께 뉴욕의 골목까지도 샅샅이 다닐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활동을 몸소 체험하는 동안 점차 뉴욕의 마력에 빠져든다. 귀국을 앞두고 내 파트너가 이별선물로 준 손때 묻은 ‘에이브러햄 링컨 자서전’은 지금도 내 서고(書庫)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에 꽂혀 있을 정도로 정(情)이 넘친다.

뉴욕의 인터내셔널센터를 떠올릴 때마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나를 배려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도록 만든다는 것. 이는 관(官)이 아니라 자원봉사자들이 주축이 돼 운영됐기에 가능하다. 방문한 외국인이 쭈뼛쭈뼛할 틈을 주지 않을 정도로 상대방의 눈높이를 맞춘 배려가 감탄할 수준이었다.

왜 뉴욕을 인종의 용광로(Melting Pot)라고 부르는지 고개가 끄덕여졌다.

단일민족을 내세웠던 한국도 이젠 명실상부한 다문화 국가로 변했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은 110만 명을 넘어섰고 서울에만 33만 명(지난해 말 기준)이 넘는 외국인이 우리 주위에서 함께 살고 있다.

최근 우리 곁 여러 곳에서 잇따라 개관한 관청 주도의 다문화센터가 이벤트성 행사들로 채워져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살면서 배려를 받고 있다”는 인식을 차곡차곡 쌓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다문화센터의 아주 중요한 성공요인이다. 요즘 뉴욕의 인터내셔널센터가 자꾸 떠오르는 것도 한국의 다문화센터가 성공적으로 뿌리내리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김동원 국제부 차장 davi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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