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삶에서 잃어버린 것 중 한 가지만을 다시 볼 수 있다면 무엇을 만나보고 싶습니까? 잃어버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리석은 자의 욕심, 현자의 질문
어느 전시장에서 마주친 설치작품 ‘무엇이 사라지고 있는가’는 관객 스스로 자기 삶을 돌아보게 한다. 내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벽면에 붙은 설문지들을 읽어본다. “내 아버지-당신의 진실된 모습을 아주 많이 몰랐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 “나” “자신감” “열정”…. 잃어버린 것은 제각각이나 어쩐지 내 일기장을 보는 듯한 대목도 많다.
“현자들은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는 기준으로 ‘무엇을 이루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잃었는가’를 생각해보라고 권한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았나 보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지금까지의 삶에서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작가 박혜수는 이런 궁금증을 근간으로 삼아 2005년 설문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세대와 직업, 국적을 불문하고 1000명 넘게 서면과 인터넷으로 같은 질문을 던졌는데 뜻밖에 답변엔 공통점이 많았다. ‘타인의 이야기가 곧 나의 고백이자 이야기’라는 작가의 의도는 사뭇 현실화된 셈이다. 고단한 세상을 살면서 늘 혼자라고 느끼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타인과의 연대감이 발견된다.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꽃이었다 한다/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의 입에 단 바람에/꽃에서 야채가 되었다 한다/…/사막도 애초에는 오아시스였다고 한다/아니 오아시스가 원래 사막이었다던가/…/여하튼 당신도 애초에는 나였다/내가 원래 당신에게서 갈라져 나왔든가’(김경미의 ‘야채사’·野菜史)
나와 너는 별개인 동시에 한 몸이란 것을 알아낸 시인의 혜안을 배우고 싶다. 온 나라를 슬픔의 바다에 빠지게 만든 서해의 재난. 그 무거운 고통과 상처를 공유하면서도 왜 우리는 하나일 수 없을까. 연대감은커녕 이리저리 편 가르고 의심의 눈으로 삿대질을 해대는 한국 사회는 그동안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
고난 속에서도 느긋함과 너그러움, 도타운 정과 인간에 대한 예의를 소중히 여긴 선인들의 미덕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돌아온 병사들은 몸과 마음의 심각한 상처를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올림픽 메달리스트의 공동회견도, 옛날식 북한 귀순병사의 기자회견도 아닌 자리에 그들은 환자복 차림으로 끌려나와 카메라 앞에 일사불란하게 세워졌다. 명령에 살고 죽는 것이 군인이라면, 군인을 명예로 대접하는 것은 그 나라 그 민족의 품격과 관계가 있다. 그들의 울먹임이 마음에 걸린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헤아리기에는 이 사회는 너무 분열돼 있고 살벌하다. 굶주림의 멍에를 벗어나려 질주하다 보니 서로 기댈 공감의 영역이 사라져버린 것인가.
우리가 잃은 느긋함, 고통의 나눔
타인의 존재와 고통을 챙겨야 할 책임을 나의 자유보다 앞세울 때 비로소 자유는 의미를 지닌다고 프랑스의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말했다. 인간은 서로에 대해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다시 말한다. 자신보다 타인에게 우선권을 줄 수 있는 인간적 가능성이야말로 가치 있는 그 무엇이라고.
“생명은 그래요./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우리 또한 맑기도 흐리기도 하지요./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정현종의 ‘비스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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