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이 떨어져 지천에 널렸다는 누군가의 꽃소식을 접하고 불현듯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으로 달려갔습니다. 초당으로 오르는 오솔길 한가운데 소나무 뿌리가 고스란히 드러나 18년 유배생활의 고뇌와 시름이 오늘도 여전히 지속되는 것 같았습니다. 초당은 초행길이 아니지만 그곳에 서린 정약용 선생의 음영은 갈 때마다 새롭고 볼 때마다 심오합니다. 선생은 그곳에서 기나긴 유배의 세월을 보내며 엄청난 학문적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원망과 한탄만으로도 버거울 유배생활 동안 어떻게 그토록 강고하고 준엄한 정신력을 유지하며 자신을 다스릴 수 있었을까요.
다산초당 좁은 마당을 거닐며 인내와 극기의 세월을 되새겼습니다. 지금의 초당은 후손이 새로 지었지만 원래 선생이 머물던 곳은 말 그대로 초막이었습니다. 선생은 그곳에서 큰아들과 둘째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폐족(廢族)의 자식으로 살아가는 도리와 학문적 방향까지 일깨우며 아비의 도리를 다하고자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둘째형 약전(若銓)과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적 교류를 유지했습니다. 그렇게 18년 동안 그는 학문적 탐구를 게을리하지 않고 비관이나 좌절을 경계하며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나날을 살았습니다.
다산은 현실주의적 실학사상가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18년 유배생활은 그를 시인으로 만들고 화가로 만들고 의학자로 만들고 정치경제 전문가로 만들고 철학자로 만들고 다방면의 저술가로 만들었습니다. 인내와 극기를 통해 학문적 탐구심과 집중력을 끈덕지게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조의 구태의연한 학문 풍토에서 벗어나 진보적인 신학풍을 온몸으로 집대성한 선생의 업적을 두고 위당 정인보는 “선생 1인에 대한 연구는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근세사상의 연구요, 조선 심혼(心魂)의 명예(明銳) 내지 전조선 성쇠존망에 대한 연구”라고 극찬했습니다.
자유와 풍요가 넘쳐 인내와 극기가 사라진 21세기, 다산의 유배길을 걸으며 인생의 참다운 의미에 대해 생각합니다. 풍병(風病)이 깊어 입가에 침이 흐르고 왼쪽다리에 마비가 오고 머리에 솜털모자를 쓴 채 저술활동을 지속한 다산의 근기(根氣) 속에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정신적 유산이 숨어 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정신은 너무 나약하고 너무 산만해졌습니다. “한때의 재난으로 청운의 뜻을 꺾어서는 안 된다”는 선생의 꾸짖음, “가슴속에 항상 가을 매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기상을 품고서 천지를 조그마하게 보고 우주도 가볍게 손으로 요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녀야 옳다”는 준엄한 가르침이 오늘의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다산초당 뒷산을 덮은 붉은 동백꽃을 보며 선생의 열정과 고뇌를 동시에 헤아립니다. 고난과 고뇌 속에서 한없이 깊어진 지혜, 그리고 사유와 탐구 속에서 한없이 밝아진 혜안이 유배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음미하게 합니다. 육체적인 유배를 정신적인 도야의 바탕으로 삼고 자신의 근본과 한계에 도전한 선생의 자세,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잃어버린 정신적 유산을 되찾아야겠습니다. 떨어진 동백꽃이 인내와 극기를 일깨우는 숙연한 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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