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김창원]12년 전과 껌값이 똑같은 일본

  • Array
  • 입력 2010년 4월 26일 03시 00분


코멘트
1998년 일본에서 한 달 단기체류를 한 적이 있다. 일본 여행이 처음이었던 기자는 비싼 물가 때문에 마음이 늘 편치 않았다. 한번은 편의점에 들어가 껌을 집어 들었는데 껌 값이 자그마치 110엔이나 됐다. 껌 한 통에 1000원이 넘는 돈이 아까워 껌을 내려놓으며 “일본은 껌 값도 껌 값이 아니다”며 불평했던 기억이 있다. 일본에서 살려면 물가에 먼저 적응해야 한다는 말이 새삼스러웠다. 당시 충격이었던 껌 값은 12년이 지난 지금도 110엔이다. 지난해 말 도쿄 긴자(銀座)의 유니클로 매장에는 한 벌에 999엔짜리 청바지가 등장해 화제가 됐다. 우리 돈으로 1만3000원도 채 안 되는 청바지가 불티나게 팔렸다. 일본인들이 즐겨 먹는 쇠고기덮밥(규동)의 체인점 가격은 이달 들어 250엔까지 떨어져 9년 전인 2001년 때(280엔)보다도 싸졌다. 어떻게 물건 값이 10년 전과 같거나 오히려 싸질 수 있을까.

일본 통계국 홈페이지를 보니 소비자물가지수(2005년=100)가 1997년 103.0에서 지난해 100.3으로 떨어졌다. 12년 동안 거의 매년 물가지수가 전년에 비해 하락했다. 1989년 부동산 거품 붕괴로 시작된 ‘잃어버린 10년’이 20여 년째 이어지고 있는 일본 장기불황의 현실이다. 물가가 하락하면 소비자에게는 좋을 것 같지만 경제 전체에는 심각한 주름이 간다. 가격이 내려가면 기업의 이익이 줄어 임금 하락 요인이 되고 이는 소비심리를 꺾어 물건이 안 팔리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이른바 ‘디플레의 소용돌이’다.

일본 장기불황의 원인은 뭘까. 다이이치생명경제연구소는 최근 주요 20개국 가운데 유독 일본만이 심각한 디플레를 겪는 이유를 발견했다. 디플레는 경제성장률이나 실업률보다 인구감소율이 가장 큰 영향을 주는 변수라는 것이다. 조사에 따르면 19개국의 인구증가율은 1989년 이후 0.5∼1%대를 유지하고 있는 반면 일본은 1981년 0.7%에서 계속 추락해 2007년부터는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급속한 고령화로 인구가 줄면서 사회 전반적인 활력이 떨어지고 수요 감소에 따른 물가하락으로 이어진다는 논리다.

실제로 일본의 고도성장기는 전후 베이비붐 세대인 단카이(團塊) 세대가 20대 후반에서 30대 전반이 되는 1970년대 초반이었다. 이때는 노동생산성도 상승하고 물가상승률도 높았다. 그러나 단카이 세대가 은퇴기에 접어들기 시작한 1990년대가 되면서 디플레와 경기침체가 시작됐다. 일본의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5년에 이미 20%를 넘었고 2025년에는 30.5%에 이르게 된다.

일본의 고령화는 불건전한 재정적자 규모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연금이나 건강보험 등 노인복지 관련 세출은 크게 늘어난 반면 세입은 줄어든 탓이다. 일본의 지난해 재정적자 규모는 825조 엔으로 국내총생산(GDP)의 174%에 이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일본의 재정적자가 구조적인 문제여서 세계 경기가 회복돼도 수지 개선을 기대하기 힘들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 정부는 장기불황을 벗어나기 위해 막대한 재정을 푸는 등 안간힘을 쏟고 있다. 하지만 당장 불황을 벗어나려는 근시안적 미봉책일 뿐 고령화로 인한 인구 감소라는 근본적 원인을 해결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일본 못지않게 빠른 속도로 저출산 고령화가 진행 중인 한국의 현실은 어떤가. 일본이 겪고 있는 심각한 장기불황이 앞으로 10년 15년 뒤 우리의 미래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벌써부터 답답해진다.

김창원 도쿄 특파원 changki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