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최영훈]바위에 새겨야할 이름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4월 27일 20시 00분


이틀 전(26일) 굵은 비가 내렸다. 때 아닌 장맛비 같았다. 어제도 종일 날은 흐렸다. 하늘도 비통한 마음일까. 해군 2함대사령부를 비롯한 전국 분향소엔 조문 행렬이 꼬리를 문다. 여야도 없고, 남녀노소도 가리지 않는다. 애도와 슬픔이 온 나라를 적신다. ‘천안함 46용사(勇士)’를 애도하는 현수막이 곳곳에 내걸렸다. 각계의 성금이 잇따랐고, 하나원의 탈북자도 성의를 표했다.

기자도 동료들과 함께 이틀 전 서울광장 분향소에 들렀다. 조문 뒤 ‘추모의 벽’을 둘러봤다. 색색의 종이에는 온갖 사연들이 적혀 있다. ‘해군용사 아저씨들! 영원히 안 잊을 게요’라는 초등학생의 글부터, ‘김정일, 이번에는 반드시 본때를 보이겠다’는 힘찬 글까지 다양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쓴 뭉클한 글, 함께 근무했거나 피붙이가 쓴 애절한 사연엔 콧날이 시큰했다.

노란 종이 2장에 나란히 쓴 글이 특히 눈에 띄었다. ‘천안함 용사들! 부디 영면하기 바란다.’ ‘참수리호(357정) 용사들이여! 그대들 또한 잊지 않으리.’ 같은 필체로 해군 출신 누군가가 쓴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 천안함 희생자도 기억해야 하지만 제2연평해전 희생자(사망자 6명)들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이들은 진정 ‘교전 중 희생자’였다. 성능이 훨씬 뛰어난 고속정과 첨단장비를 갖고서도 적의 기습에 당했다.

박경수 중사도 그때 중상을 입었다. 당시 그는 우현 쪽의 63포 사수였다. 적진 쪽인 좌현이 피격되면서 62포 사수(박진성 하사)가 쓰러졌다. 곧바로 총탄이 쏟아지는 좌현으로 그는 내달렸다. M60 기관총을 대신 잡고 적함을 향해 정신없이 총탄을 퍼부었다. 18분간의 사격전이 끝났을 때 바로 옆의 서후원 하사는 숨져 있었다. 자신도 적탄에 맞아 피투성이가 됐다. 혼신의 힘을 다하느라 아파할 새조차 없었다. 8년 전 조국을 위해 한차례 목숨을 걸었던 그는 끝내 귀환하지 못했다. 박 중사는 최후의 모습조차 보지 못한 억울한 산화자로 남았다.

2차 연평해전 발발 3년 전 우리 해군은 1차 연평해전에서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하는 북 어뢰정 1척을 침몰시키고 경비정 5척을 대파하는 전승(戰勝)을 거뒀다. 이후 김대중 정부의 군 당국은 NLL을 침범하는 북 함정을 차단기동→경고방송과 퇴각요구→경고사격→위협사격을 거친 뒤에야 조준사격을 허용하는 안이한 교전수칙을 만들었다. 1차 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해군이 2차 해전에서 6명이 숨지고 함정까지 침몰한 것은 잘못된 교전수칙 때문이었다. 평택 제2함대사령부에는 2008년 안보공원이 조성됐다. 이곳의 전적비 뒤편에는 전사자 6명의 부조가 있다. 부근에 서있는 참수리 357호정의 좌현과 포탑에는 지금도 포탄 자국이 선연하다.

지금 온 나라가 애도의 물결에 휩싸여있다. 그러나 영결식이 끝나고 시간이 흐르면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가게 된다. 지극한 슬픔도, 치 떨리는 분노도 세월 앞에는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영원히 잊지 말자’는 추모의 글은 역설적으로 이를 웅변한다. 하지만 시신이 태극기에 싸여 나올 때마다 울부짖던 유족들은 다르다. 세월이 흘러도 길을 가다 해군장병을 보면 소매를 부여잡고 눈물짓지 않겠나.

먼저 정부와 군 당국은 희생자들이 영면할 합동묘역과 추모시설을 만드는 데 한 치의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제복을 입고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국가유공자들에게 합당한 예우를 우리는 그동안 제대로 못해왔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준 것은 물에 적고, 받은 것은 바위에 새겨라’는 말이 있다. 천안함 46용사, 참수리호 희생자, 한주호 준위에게 어떤 보답을 해준들 그들이 살가운 가족 곁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인가. 목숨을 건 투혼과 살신성인한 그들의 의로운 정신이나마 쉽게 지워지지 않도록 바위에 새겨야 할 것 같다.

최영훈 편집국 부국장 tao4@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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