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선이 히말라야 8000m 이상 봉우리 14개를 완등했다. 나는 사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구체적으로 모른다. 다만 성공한 사람보다 실패한 사람이 훨씬 많으며 그 실패란 추락 아니면 동사(凍死)라는 사실 정도만 짐작할 뿐이다.
숨이 막힐듯 웅장한 안나푸르나
어찌 됐든 오은선은 거기 올랐다. 그리고 성공했다. 여자로선 세계 최초라 한다. 죽음의 공포를 숱하게 넘어서며 강풍과 강추위의 고통을 이 악물고 견디며 마침내 신이 허락하지 않으면 오를 수 없다는 까마득한 봉우리에 오른 사람. 그를 부를 호칭이 대장이라는 점이 나는 썩 마음에 든다. ‘대장’은 뒤따르는 부하와는 서 있는 위치가 다른 사람이다. 시야가 넓고 멀 수밖에 없다.
옹색하고 졸렬하게 눈앞의 이익에만 매달려 헛되이 기운을 소모하는 것이 갑남을녀의 삶이다. 도덕과 인의를 외치고 무소유를 주장해봤자 어디 실현 가능한 일이던가. 비루하고 팍팍한 일상에서 저런 대장이 쑥쑥 나타나 줘야 인간이 비로소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다. 8000m 이상 봉우리에 올라선 오 대장의 붉은 옷자락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가슴은 격하게 뛴다. 사람에게 받은 실망과 상처가 치유된다. 의식이 정화된다. 종교가 우리 죄를 대속해줄 희생자를 필요로 하는 것과 같다. 나는 일견 무모하고 무용해 보이는 저 목숨을 건 고산 등정의 효용을 그렇게 이해한다.
‘작은 거인’의 경이로운 도전
작년 이맘때 나 또한 안나푸르나 언저리에 있었다. 만년설 밟는 시늉도 못하고 고작 다울라기리와 안나푸르나 사우스의 위용을 바라볼 뿐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황홀했다. 숨이 막혔다. 절대와 신성이 존재한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봉우리는 우리가 닿을 수 없는 신비를 눈앞에서 보여주되 아주 변덕스럽게 흔들렸다.
내 눈으로 목격한 안나푸르나 꼭대기는 청명한 날에도 고정돼 있지 않고 기체처럼 주변 공기 속으로 자욱하게 흩어졌다. 강풍이 시종 눈발을 휘날리고 얼음 덩어리가 간헐적으로 떨어져 내리는 영하 30도가 넘는 곳에 살아있는 사람이 올라간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박영석 엄홍길 한왕용이 거기 올랐음을 나는 안다. 눈앞에 있다면 기꺼이 그들 발밑에 엎드려 경배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번엔 오은선이 올랐다. 매사에 여성이란 꼬리표를 붙여놓는 일이 나는 불만이지만 이번엔 경우가 아주 다르다. 세계 최초니 최고니 하는 호들갑도 좋아하지 않지만 이번엔 진정으로 경이롭다고 해야 마땅하다. 키 155cm, 체중 48kg이란 자그마한 몸뚱이가 세계 최초로 해낸 일이다. 오은선의 별칭은 ‘날다람쥐’ 또는 ‘독한 년’이다. 앞은 신체조건이고 뒤는 정신조건일 텐데 둘이 버무려지지 않았더라면 결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여린듯 강인한 그녀의 힘
오은선은 마음결이 여린 사람이다. 에베레스트에서 박무택의 죽음을 보고 그냥 지나쳤다는 비난을 받을 때, 라이벌 에두르네 파사반으로부터 칸첸중가 등정이 거짓이라는 음해를 당할 때, 과잉 경쟁으로 후배 고미영을 잃었다는 눈 흘김을 받을 때 억장이 무너져 혼자 줄줄 울었다. 그러면서 히말라야 14좌를 에베레스트와 K2 이외엔 산소통 없이 혼자서 등반할 만큼 철저하고 강인했다. 여린 강인함, 이게 오은선에겐 형용 모순이 될 수 없다. 아니 그게 바로 오은선의 힘이다. 김연아에게 강인한 부드러움이 그토록 자연스럽듯이!
오은선이란 이름은 꽃 없던 올봄을 환하게 밝혔다. 천안함 침몰의 아우성으로 스산하고 메마르던 한반도의 봄날에 안나푸르나 설산 꼭대기에서 배달된 빨간 빛깔 꽃이다. 은선이란 이름이 나물 같다고 했던 건 소설가 신경숙이었던가. 그 나물같이 여린 은선이가 오늘 아침 우리 마음속에 대장으로 등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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