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태훈]티격태격할 시간 없는 북한인권기록보존소 설치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5월 6일 03시 00분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게 임무인 전쟁에서조차 ‘민간인 대량학살’ 같은 범죄가 일어나면 철저히 단죄하는 것이 국제사회에 통용되는 정의(正義)의 원칙이다. 천안함 침몰사건으로 46명의 해군 병사들이 목숨을 잃은 것에 온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도 이 사건의 본질이 ‘누군가가 아무 이유 없이 다수의 인명을 앗아간 범죄’란 점 때문이다. 천안함 침몰 원인과 북한의 관련성 여부는 아직 규명되지 않았지만, 북한 정권은 과거 반세기 동안 남쪽의 군과 주민을 대상으로 470여 회에 걸쳐 테러를 감행해 4000여 명이 희생됐다.

또 북한 정권은 체제유지를 위해 북한 주민과 탈북자들의 인권을 탄압하고 있다. 정치범수용소에 감금된 한 여성이 굶어죽은 자식의 인육을 먹었다거나 하는 처참한 증언들이 탈북자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강제 송환된 탈북자들이 공개 처형됐다는 소식도 간간이 들려온다.

남한이든 북한 주민이든 모두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점에서 북한 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는 언젠가는 그 진상과 책임 소재가 가려져야 하고, 처벌이 뒤따라야 한다. 하지만 범죄에 대한 처벌은 의욕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증거가 있어야 한다. 물증이 있으면 좋겠지만 북한과 중국에서 주로 일어나는 탈북자 인권탄압 사례는 접근이 어려워 관련자들의 진술 외에 다른 증거를 찾기 쉽지 않다.

현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심의 중인 ‘북한인권법’ 제정안에는 ‘북한인권기록보존소’를 설치하는 방안이 포함돼 있다. 통일 후 북한의 인권침해 범죄를 처벌할 때 사용할 증거자료를 수집하고 보관할 북한인권기록보존소는 1961년 서독이 니더작센 주 법무부 산하에 설치했던 ‘중앙법무기록보존소’를 모델로 삼은 것이다. 당시 동독의 국경수비대가 베를린장벽을 넘어 탈출하는 동독 주민에게 총격을 가하자 서독 정부는 “생명권을 유린하는 범죄행위”라며 총격 범죄의 증거 수집을 위해 보존소를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에 축적된 증거자료들은 통독 이후 동독정권의 지도자였던 에리히 호네커 등 관련자들을 기소하는 데 요긴하게 활용됐다.

지금 국회 논의 과정에서 북한인권기록보존소를 법무부에 설치하느냐, 아니면 국가인권위원회에 두느냐, 아니면 민간 기구 성격을 띤 북한인권재단에 둘 것이냐를 놓고 논란이 많다. 중국 등 제3국을 떠돌고 있는 탈북자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신분이 노출될까 두려워 인신매매와 임금착취, 성폭력 등에 시달리며 피를 말리는 생활을 하고 있다. 북한 정권의 직접적인 인권침해 속에 살고 있는 동포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라도 국회와 관련기관들은 서둘러 논란을 종식시키고 북한인권기록보존소를 설치해야 한다.

이태훈 사회부 jeffle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