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윤종구]‘선거용 空約’에 발등 찍힌 하토야마 총리

  • Array
  • 입력 2010년 5월 7일 03시 00분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일본 총리가 4일 오키나와(沖繩) 현을 방문했다가 봉변에 가까운 홀대를 받았다. 주민들이 반대하는 후텐마(普天間) 미군비행장의 현 내 이전에 대해 양해를 구하기 위한 방문이었으나 혹만 붙인 꼴이 됐다.

주민들은 총리가 오키나와 지사와 나고(名護) 시장을 만나는 장소로 몰려가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 자리에서 이나미네 스스무(稻嶺進) 나고 시장은 총리가 일어서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사과 겸 부탁 발언을 끝내자 냉랭한 태도로 “나는 앉아서 말하겠다”고 해 좌중을 놀라게 했다. 간담회가 끝난 뒤 흥분한 일부 주민이 총리에게 달려들다 경호원의 제지를 받았다. 여간해선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일본 국민성을 생각하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하물며 자국 총리를 상대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오키나와는 지난해 총선에서 압도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했던 곳이다. 불과 1년 사이에 무엇이 이토록 오키나와 주민들을 화나게 했을까.

자민당과 민주당이 정권을 놓고 결전을 치르던 지난해 8월, 당시 제1야당이던 민주당의 하토야마 대표는 선거유세에서 “정권을 잡으면 후텐마를 일본 밖으로, 최소한 오키나와 현 밖으로 이전하겠다”고 약속했다. 주민은 열광했다. 집권당 시절 후텐마를 나고 시로 옮기자고 미국과 합의했던 자민당은 참패했다.

그러나 총선 열기가 식기도 전에 하토야마의 약속은 무모했다는 게 드러났다. 미국은 ‘기존 합의 파기’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다. 민주당 정권도 대안을 찾지 못했다. 연립정권 파트너인 사민당조차 설득하지 못했다. 미국의 냉대와 지지율 급락에 다급해진 총리는 “5월 말까지 직을 걸고 후텐마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시한까지 정해 스스로 퇴로를 막았다. 마감에 쫓긴 정부는 기존 미일 합의를 약간 수정한 ‘정부안’을 만들었고 오키나와가 강력 반발하자 총리가 직접 현지를 찾기까지에 이른 것이다.

하토야마 총리는 오키나와에서 “집권 후 깊이 공부해 보니 현 밖으로 기지를 다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며 “당시 약속은 개인적 약속이었지 당 공약이 아니었다”고 말해 주민을 더욱 화나게 했다. 표를 노린 공약(空約)이었다는 고백인 셈이다.

현재 일본 내 다수 여론은 총리가 약속을 못 지킬 경우 퇴진해야 한다는 쪽이다. 정권 지지율이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고 7월 참의원 선거 패배 전망이 나오는 것도 후텐마 후폭풍의 영향이 크다. 정치지도자의 입은 천근보다 무거워야 한다는 점을 하토야마 총리가 역설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윤종구 도쿄 특파원 jkmas@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