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세상/이상욱]과학자의 예술성이 빛을 발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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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5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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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예술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라는 영화를 보면 동명의 유명한 그림을 그린 얀 페르메이르라는 네덜란드 화가가 카메라 오브스쿠라라는 광학장치를 사용하여 대상을 정교하게 묘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구태여 페르메이르를 들먹이지 않아도 예술가는 종종 자신의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과학적 발전이나 기술적 응용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최근 광주 빛 엑스포처럼 과학과 예술의 만남을 추구하는 행사도 이런 상호작용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과학과 예술은 좀 더 미묘한 방식으로 만나기도 한다. 과학연구는 흔히 확실한 경험적 증거에 기반을 두고 빈틈없는 논리로 확고한 결론을 이끌어낸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과학관에 잘 어울리는 개념이 ‘결정적 실험’이다. 만약 경쟁하는 두 이론이 서로 다른 현상을 예측한다면 실험을 통해 두 이론 중 어느 것이 맞는지를 확인해 볼 수 있다는 생각이다.

결정적 실험의 유명한 예로 아라고의 실험이 있다. 뉴턴은 빛이 입자라고 주장했고 프레넬은 파동이라고 주장했다. 이 상황에서 뉴턴 이론에 호의적이었던 푸아송은 프레넬 이론이 맞는다면 동그란 원판의 그림자 한가운데 밝은 점이 나타나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푸아송의 기대와 달리 이 기이한 현상은 아라고의 실험에 의해 실제로 관찰됐고 결국 빛이 파동이라는 프레넬의 이론이 승리한다. 이처럼 결정적 실험을 통해 이론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내리는 과학연구와 예술가마다 다를 수 있는 미적 감각에 호소하는 예술은 사뭇 달라 보인다.

정말 그럴까? 우리는 빛이 파동과 입자의 성질을 둘 다 갖는 이상야릇한 것임을 안다. 그렇다면 프레넬의 추론에 문제가 있었을까? 아니면 아라고가 실험을 잘못했을까? 둘 다 아니다. 빛이 파동이라면 밝은 점이 나타나야 한다는 프레넬의 추론은 여전히 타당하다. 하지만 프레넬의 추론은 빛이 파동도 아니고 입자도 아닌 상황에서도 밝은 점이 나타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라고의 실험은 실험 결과가 의미하는 바를 해석하는 일에 있어 최선을 다한 과학자도 여전히 틀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같은 상황은 과학연구에서 흔하게 일어난다. 당대 최고의 천문관측자 튀코 브라헤는 코페르니쿠스 이론이 옳다면 별의 위치가 여름과 겨울에 달라져야 한다고 올바르게 추론하고 이 차이를 관측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대부분의 천문학자는 코페르니쿠스 이론을 종교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브라헤의 관측결과와 어긋났기에 불만족스럽게 생각했다. 물론 계절에 따른 별의 위치 차이는 존재한다. 너무 작아 당시 관측기술로는 발견할 수 없었을 따름이다.

과학자는 연구과정에서 끊임없이 어려운 판단을 해야 한다. 이 실험결과를 믿을 수 있을까, 실험장치 설계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실험결과와 이론이 일치하지 않는 이유가 실험이나 이론 말고 다른 데 있지 않을까…. 이런 상황에서 똑같이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연구를 수행한 연구자 사이에 의견이 갈릴 수 있다. 대부분의 논쟁은 후속 연구를 통해 해결되겠지만 다음엔 또 다른 논쟁이 기다린다.

결국 일상적인 과학연구에서 개별 연구자는 실험 이론 자료 기구 등 다양한 현상 사이의 일치와 불일치를 설명하고 다음 연구를 어떻게 진행시킬지에 대한 끊임없는 판단에 직면한다. 여기에 과학연구의 예술적 성격이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다양한 판단의 폭을 합리적으로, 하지만 이견의 여지를 남긴 채 좁혀 나가는 과정에서 과학연구자들은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발휘한다.

이상욱 한양대 철학과 교수

※사외(社外) 기고는 본보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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