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호 칼럼]환상과 위선과 무지의 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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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5월 13일 03시 00분


천안함 참사를 비롯하여 올봄 들어 발생한 북한 관련 일련의 사건을 보면 우리는 이제 평화통일이라는 염원에 사로잡혀 현실을 외면하는 호기와 만용을 부릴 여유가 없음이 확실하다. 우리 젊은이 누구라도 천안함 희생자의 대열에 끼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지금 우리 앞에 닥친 문제는 민족통일에 앞서 대한민국 국민 스스로가 통합된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주인으로 얼마나 더 오래 대내외적으로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천안함 격침이 북한의 소행이라고 단정할 만한 직접적 증거는 없다. 하지만 불행히도 천안함이 어뢰에 피격당했다는 과학적 증거는 충분하며 모든 정황으로 볼 때 강성국가를 자처하며 남측에 대한 보복의지를 거침없이 드러낸 북한 이외에 그 용서 못할 행위의 주체로 지목받을 만한 다른 대상이 없다.

천안함 사건 전에도 북핵 문제가 이미 우리뿐 아니라 온 세계의 걱정거리였고 우리에게는 핵 문제 발생 전부터도 북한은 포용해야 할 불쌍한 동족인 동시에 가장 경계해야 할 ‘주적’이었다. 다만 지난 정권들이 대북 포용정책을 추진하면서 좌파 문화권력은 북한의 실상을 정확하게 알리는 일조차 냉전적 사고니 색깔 논쟁이니 하면서 마치 반민족적 행위인 양 몰아붙이며 북한에 대한 경계의식을 마비시켰기 때문에 이번 참사에도 격렬하게 분노가 표출되지 못하는 것뿐이다.

10년 대북 포용정책의 성적표

2000년 정상회담 이래 우리가 추구한 북한 포용정책의 결산은 과연 무엇인가. 러시아와 유럽의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나서 우리와 북한은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고 남북한 기본합의서를 채택함으로써 평화공존을 하다가 강대 이웃과의 공조 속에서 평화적 통일로 들어서는 길이 현실적으로 열리는 듯했다. 그 후 얼마 지나서는 북한 체제의 붕괴로 남쪽 중심의 흡수통일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점쳐지기도 했다. 북에 대한 남의 우위는 거의 절대적이었고 드디어 우리는 북한의 위협을 의식하지 않고 살게 된 듯했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우리는 북핵의 볼모가 됐고 우리 자산의 일방적인 몰수나 천안함 참사 같은 참변을 당하고도 손발이 묶인 형국이 아닌가. 더구나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기대했던 중국의 노골적인 북한 편들기 앞에서는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낀다. 우리를 속국으로 취급했던 먼 과거는 말할 것도 없고 북한이 도발한 6·25전쟁에서도 북진통일을 좌절시킨 것이 중공군의 개입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남을 탓하는 일은 과거나 지금이나 부질없다. 필요한 것은 착각이나 잘못을 반성하고 같은 실수를 하지 않는 일이다. 우리가 남북 정상회담으로 들떠 있었을 때에도 외국의 북한전문가들은 북한이 정상적인 국가로 회생해서 자립할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우선은 후의를 베풀어 적대감을 해소하고 신뢰를 구축하며 북한을 지원하여 자립하도록 돕는 일이 흡수통일보다 나은 길이라는 생각은 같은 민족으로서 충분히 해볼 만했다. 하지만 상호 신뢰 구축을 통한 평화로운 관계 수립이란 목표는 처음부터 빗나갔다. 남북 간에는 물론이고 대한민국 안에서도 대북 포용정책은 처음부터 진실성이 결여된 동상이몽의 야합이었지 남북동포가 다 같이 잘되어야 한다는 고매한 이상주의와 투철한 현실인식에 바탕을 둔 합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6·15선언의 핵심으로 내세워지곤 하는 제2조, 곧 북한의 고려연방제안의 낮은 단계와 남한의 통일방안이 공통점을 가진다는 선언은 국가권력의 작동원리에 대한 완전 무지나 위선에 기초한 것으로 북한의 적화통일 야욕을 아름다운 포장으로 감싸주는 결과밖에 안 됐다.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 때 북측 대표로 온 사람은 대한민국을 배반하고 월북한 사람 가운데 최고위직 출신인 최덕신 전 외무장관의 처로 천도교 청우당 위원장이던 유민영이었다. 황장엽 선생을 우리 측 이산가족 대표로 보내는 일과 다름없는 행위를 정부와 국민이 묵인함으로써 대북 포용정책은 초기부터 북측의 의도대로 놀아날 것임을 예약했던 셈이다.

현실 못 깨달으면 희생 헛돼

햇볕정책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 동상이몽의 야합이었다. 진정한 친북세력은 그것이 흔들리는 북한 체제를 살려내는 길이라서 적극 밀었던 반면 남측 기득권은 흡수통일보다 비용이 적게 드는 통일 방안이라는 얄팍한 오산에서 환영했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환상과 위선과 무지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기 시작했다.

대북문제 해결에는 큰 희생과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쉬운 길이 없음을 이제라도 깨닫는다면 너무 늦지는 않다. 냉철한 현실인식에 기초한 단호한 대처로 온 국민이 합심해서 나서기까지 허용될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다. 천안함의 참극이 깨달음과 현실인식의 계기가 된다면 그 많은 아리따운 생명의 희생이 헛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인호 KAIST 김보정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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