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신광영]514일만의 난파도 못꺾은 장보고호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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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5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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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의 파도는 10m 높이의 돛대보다 높았다. 권상수 대원은 부여잡고 있던 조종간에 가슴을 부딪혀 갈비뼈가 부러졌지만 파도는 10여 초 만에 다시 왔다. 이호근 대원은 배 반대편으로 날아갔고, 세 번째 파도를 맞자 배는 90도 기울어 물에 잠기기 시작했다.

불빛 하나 없는 밤, 하얀 거품을 문 파도는 또 올 채비를 하고 있었다. 밥을 비벼 먹던 냄비, 탐사 내용이 담긴 노트북이 떠다니는 것을 보며 장보고호 탐사대장 권영인 박사(전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책임연구원)는 두 대원에게 소리쳤다.

“이제 서서히 죽어갈 텐데… 미안하다.”

배 반대편에서 말이 돌아왔다.

“그동안 운이 기막히게 좋았죠. 여기까지 온 거 후회 안합니다.”

찰스 다윈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다윈의 항로를 돌며 지구변화를 연구해온 권 박사. 2008년 10월 미국 아나폴리스에서 출항해 갈라파고스와 하와이를 거쳐 태평양을 건너던 장보고호는 올 3월 7일 웨이크 섬 부근에서 난파됐다. 514일간 숱한 고비를 넘겨왔던 항해가 종착지인 전남 여수항까지 2주를 남기고 멈춘 것이다.

다행히 권 박사 일행은 웨이크 섬 주둔 미군에게 구조됐다. 좌초된 배까지 인양했지만 미군은 “민간 수리물자를 군사시설에 들여올 수 없다”며 수리를 허가하지 않았다. 안전에 문제가 있다며 그대로 출항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권 박사 일행은 결국 추방돼 지난달 1일 한국에 왔다. 항해는 중단됐지만 탐사 중 측정한 바닷속 이산화탄소와 메탄 농도는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포스텍 연구팀은 그 자료를 토대로 메탄이 지구온난화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고 있다.

퇴직금과 사재로 마련한 3인승 요트로 지구 둘레보다 긴 뱃길을 탐사하겠다는 그의 도전은 무모하다는 시선이 많았다. 비슷한 취지로 출항한 네덜란드 선박은 선원만 50여 명에 수백억 원의 국가예산이 투입됐다.

한 번에 완주하지 못한 결과만 본다면 그의 항해는 실패다. 하지만 1식 1찬으로 끼니를 때우고 빗물로만 세수하며 바다의 위험과 고독에 맞섰던 그 초인적인 514일을 성공과 실패의 잣대로만 재단할 수 있을까.

충남 공주 자택에서 기자와 만난 권 박사는 장보고호가 정박해있는 웨이크 섬 근처를 지나는 선박을 구해 배를 인근 섬으로 옮긴 뒤 수리할 계획이라고 했다. “야자나무 껍질로라도 배를 고쳐 꼭 완주하겠다”는 것.

“절대 녹슬지 않을 것 같던 스테인리스 장비들이 바닷물에 녹스는 걸 보면 사람이 끝까지 지닐 수 있는 물건은 없어요. 유일하게 마지막까지 가져갈 수 있는 건 아무리 꺾여도 일어서는 정신 아니겠어요.”▶dongA.com 뉴스테이션에 동영상

신광영 영상뉴스팀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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