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서재를 사진으로 본 적이 있습니다. 전기작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한 도시에서의 70년, 한 집에서의 40여 년, 언제나 똑같은 방에서 이뤄진 진찰, 똑같은 소파에서의 독서, 똑같은 책상에서의 문학 작업’이라고 언급한 바로 그 공간입니다.
프로이트가 40년 동안 사용한 서재에는 사방 벽면에 책장이 있고 공간의 중심에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어 언뜻 보기엔 보통 서재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 공간에서 프로이트는 40년 동안 인간의 정신을 연구하고 학문적으로 밝히는 글을 썼습니다. 인류의 정신이 그의 서재에서 분석되고 또한 체계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일관되고, 이렇게 집중되고, 이렇게 헌신적인 희생을 통해 한 사람의 생애가 인류에 이바지하게 만드는 창조의 공간, 그것이 바로 서재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서재를 책이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확장하면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공간 정도로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서재 판단의 여부를 책에 두기 때문입니다. 그럼 책만 있으면 다 서재가 되는가? 그 지점에서부터 서재는 책만 있으면 되는 공간이 아니라 창조적인 개성을 지닌 공간으로 각별한 의미를 얻게 됩니다. 예컨대 초등학생이나 중고교생의 방에도 책은 있고, 그곳에서 아이들은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지만 서재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서재는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의 영혼의 방입니다.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고 한 번 만들어진 상태로 고착되지 않습니다. 서재는 공간 이용자와 끊임없이 교류하며 창조적인 사유를 자극하고 조성합니다. 인류가 이룩한 모든 학문적 성과, 그리고 진보와 성찰이 대부분 서재라는 창조의 공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재가 없는 세상은 상상만으로도 삭막하기 짝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서재를 지닌 사람과 서재를 지니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서재는 책과의 친분에서 잉태되니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서재의 필요성이 대두되지 않습니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서재를 부질없는 공간 낭비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서재를 지닌 사람과 서재를 지니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세월이 갈수록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꽃나무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정원과 황량한 불모의 사막처럼 인성에서 비견할 수 없는 차별성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서재는 사유를 낳는 출산의 공간입니다. 사유가 치열하게 달아올라 무에서 유가 탄생하기도 하고, 존재하는 것의 의미에 변화를 가하는 공작소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서재는 다른 무엇보다 지친 심신을 편히 쉬게 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속 깊은 성찰의 공간을 제공해 줍니다. 그리하여 잉태 출산 공작 휴식 성찰이 이루어지는 공간을 가진 사람은 자기 삶의 사이클이 흐트러지거나 집중력이 산만해질 때마다 서재를 통해 자신을 충전하고 또한 재생합니다. 창조적인 인생의 요람, 그대의 서재에서는 지금 무엇이 잉태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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