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서정보]팔팔한 노인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6월 9일 03시 00분


“나도 인간이다. 나도 남자야. 나도 느낀다. 나도 아름다운 거 좋아하고, 너희들하고 똑같단 말이야. 알겠냐, 이놈들아.”

3일 방영한 MBC 드라마 ‘나는 별일 없이 산다’ 3회에서 주인공 신정일(강신성일)은 가슴을 치며 절규한다.

70대 ‘노인’인 그가 40대 여성과 사귄다는 이야기가 나돌자 후배가 “그동안 별일 없이 잘 사셨잖아요. 마무리를 잘하셔야죠”라고 만류한 뒤였다.

그는 전직 영문과 교수이자 남부럽지 않은 재력도 지녔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노인’을 보는 시각에 절망을 토했다.

한국 사회는 유례없이 빠르게 고령화가 전개되고 있다. 2000년 노인이 전체 인구의 7%를 차지하는 ‘고령화사회’에 진입했다. 2018년에는 노인이 전체 인구의 14%를 넘는 ‘고령사회’가 된다.

이런 현실을 감안해 6·2지방선거에서도 ‘노인 복지 공약’이 쏟아졌다. 예를 들면 서울시장 선거만 해도 한나라당 민주당 자유선진당 민주노동당 모두 노인틀니 비용을 일부 혹은 전액 보조해 주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노인 유권자의 표심을 잡기 위해 ‘틀니’가 가장 효과적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노인은 선거 때만 구애의 대상일 뿐이다. ‘고령화사회의 덫’과 같은 표현에서 알 수 있듯 노인을 암묵적으로 ‘우리 사회에 부담을 주는 존재’로 여기고 있다. 급속한 산업화 속에서 노인들이 존재 가치를 잃고 뒷방 신세로 내몰렸다. 더 나아가 고령화사회에선 노인이 ‘사회의 활력을 떨어뜨리고 잠재적 성장률을 갉아먹는 비참한 존재’로 전락하고 있다.

각종 보고서에선 노인과 관련한 부정적 통계가 범람한다. 40년 뒤인 2050년 노인 인구 구성비는 38.2%로 높아지고 생산 가능인구(15∼64세) 10명이 부양해야 하는 노인(65세 이상)은 7명이나 된다. 노인 의료비 문제는 건강보험 재정 악화의 제1 원인으로 꼽힌다. 치매 질환 진료비는 2002년 334억 원에서 지난해 4524억 원으로 12배 증가했다.

여기에 노인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 인식이 추가된다. 노인의 취업을 얘기했다간 “젊은이들의 실업이 심각한데 노인이 양보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 즉각 날아온다. 노인은 사회의 생산성과는 무관한 존재이며 드라마처럼 사고 치지 말고 깔끔하게 삶을 마무리하는 데나 신경 써야 한다.

그래서 우리 사회 노인들은 우울할 수밖에 없다. 답답한 심정을 터뜨릴 곳도 없다.

노인 우울증 진료비는 2002년 182억 원에서 지난해 662억 원으로 증가했다. 경찰대가 발표한 ‘노인자살 실태 분석과 예방 대책’에 따르면 61세 이상 자살자는 1989년 788명에서 2008년 4029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발상을 바꿔 고령화시대에 노인이 주인공이 될 순 없는 것일까. 65세 이상을 노인으로 정하는 현재의 기준은 고령화 시대에는 적합하지 않다.

노인 문제를 연구하는 ‘한국 골든에이지포럼’의 김일순 공동대표회장(연세대 의대 명예교수)은 “조만간 지금의 60대에 버금가는 건강을 가진 ‘팔팔한’ 80대 노인들이 급증하고 현재 40대의 절반 이상이 80대까지 산다”고 말했다.

팔팔한 노인들을 사회 각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고령화의 덫’을 벗어날 수 없다. 노인을 희망도 욕구도 없는 존재로 방치하는 건 사회적 낭비다. 가끔 수십 년 연하와 연애하는 ‘사고’를 치더라도 박수를 쳐주자.

서정보 교육복지부 차장 suhcho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