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우리나라를 방문한 일본 시인들을 만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고야마 슈이치(小山修一) 시인에게서 ‘한국의 별,
이수현(李秀賢) 님에게 바치는 시’라는 시집 한 권을 받았다. 그는 직접 사인을 해주면서 “이수현 씨의 의로운 죽음에 감동받아
시집을 내게 되었다”고 말했다. 자리에 함께했던 이수현의 부모님에게도 정중한 태도로 시집을 증정하면서 시종 감동어린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너는 내게 있어 여전히/맑은 하늘이며/상큼한 한줄기 바람이며/마음과 마음을 잇는 무지개며/열렬히
타오르는 혁명의 등불이다.’ 그가 쓴 ‘한국의 별’이라는 시다. 그는 이 시에서 이수현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노래한다.
일본에 유학 중이던 이수현은 도쿄 신오쿠보 역에서 선로 아래로 떨어진 술 취한 남자를 구하려다 희생된 한국의 청년이다. 나는
그때 역사적으로 적대관계에 있는 일본인을 굳이 목숨까지 던져가며 구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만일 일본인이 그의
죽음을 외면하거나 폄하한다면 죽음의 가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또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한
생각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인은 그의 숭고한 죽음의 가치를 인정하고 높이 기렸다. ‘너를 잊지 않을 거야’라는 영화를
만들어 추모시사회 때는 일왕 부부와 정부 요인이 참석해 30분간 기립박수를 보냄으로써 일본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영문 이니셜을 따서 만든 ‘LSH아시아장학회’에서는 매년 추모행사를 갖는다. 일본인이 그의 죽음을 무관심하게 대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가. 물론 청년 이수현의 죽음의 본질은 살신성인의 자기희생이 그 바탕이다. 이 바탕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희생의
대상자인 일본인이 가치를 부여해줌으로써 그의 죽음은 비로소 숭고한 가치를 지닌다.
故이수현 씨에 헌시 바치는데…
우리 현대사엔 남을 위해, 혹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죽은, 자기희생적 죽음의 형태가 많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만든 참으로 고귀한 죽음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이 시대엔 남을 위해, 또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도 그 목숨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
일제강점기에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에 대해서도, 6·25전쟁 전사자에 대해서도, 저 어두운 1980년대 민주열사에 대해서도
그렇다. 최근엔 정치적 이해득실의 잣대가 판단기준이 되는 제2연평해전과 천안함 폭침사건 전사자에 대해서도 그렇다. 만일 그들의
죽음에 숭고성이 사라진다면 그들의 죽음의 가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조국을 위해 죽은 죽음에 대한 가치의
형성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자의 몫이다. 개인이든 국가든 피할 수 없는 의무이자 책무다. 미국이 북한 땅 어디에 있을지 모를
미군 실종자에 대해 “마지막 한 명의 유해라도 끝까지 찾아 고향으로 돌려보내겠다”고 공언하는 것은 조국을 위해 적지에서 죽어간
죽음에 대해 가치를 부여해주기 위해서다.
불행히도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북한에 생존해 있는 국군포로조차
귀환시키지 못하는 처지에 유해 송환 문제는 꺼낼 수조차 없다. 북한 땅에서 숨진 채 60년 세월이 흐른 지금 그들의 죽음의 가치는
누가 평가하나.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우리는 평생 기억한다. 기일을 잊지 않고 제사를 지내면서 슬픔을 감내하고
추억한다. 억울한 죽음일 경우는 더욱 뼈저리게 아파한다. 조국을 위해 죽은 이에게도 내 가족의 죽음을 대하듯 우리의 마음만은
그래야 하지 않을까.
‘죽은 이만 서럽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죽은 이의 죽음에 부여된 가치가 훼손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 사회가 죽은 이만 서러운 사회가 된다면 미성숙한 사회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어제 죽은 이의 희생을
바탕으로 오늘의 안위를 누리고 있으므로 죽은 이만 서럽게 하는 이기적인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숭고한 희생 존중하는 사회를
천안함
폭침사건으로 전사한 신선준 상사의 친모가 보상금의 절반을 요구한다고 한다. 그녀는 신 상사가 두 살 때 집을 나가 재혼한 뒤
30년 가까이 신 상사를 찾은 적이 없음에도 이미 보상금 중 1억 원을 찾아갔다고 한다. 돈이 탐나서 친권을 주장하고 나섰다는
비판을 들을 만하다. 법의 논리가 어떻든 조국을 위해 죽은 전사자의 숭고한 죽음의 가치를 희석시키는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죽음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다. 나의 죽음에 가치를 부여받고 싶다면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의 죽음에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삶의 가치는 내가 만들 수 있지만 죽음의 가치는 내가 만들 수 없다. 살아 있는 자가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면 아무리 위대한
죽음이라도 빛이 바래고 만다. 지금은 나라를 위해 죽은 이에 대해 오늘을 사는 우리가 더욱 겸허해져야 할 때다. 남과 국가를 위한
죽음만큼 더 큰 사랑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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