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고장의 특색을 널리 알리기 위해 지방자치단체가 만든 ‘브랜드 슬로건’이 최근 러시다. 흥미로운 것은 그중 상당수가 최고 최강임을 은근히 강조하기 위해 수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점.
녹차수도 ○○, 자전거수도 ○○, 문화수도 ○○, 세계공예의 수도 ○○라는 슬로건도 있다. 대한민국 생태수도라는 표현에 이르면 입가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자세히 보면 그 고장의 특징과 수도라는 어감이 ‘헐렁한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게 들리는 문구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수도의 사전적 의미는 ‘한 나라의 중앙정부가 있는 도시’다. 생태 정신문화 등과 같이 자연친화적인 의미와 수도는 그다지 잘 어울리지 않은 조합인 것 같다. 과장이 섞인 것으로 비칠 수도 있다. 충분히 이해는 간다. 여기가 중심 지역이라거나 핵심 고장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을 터.
친분이 있는 한 지방자치단체장은 “지역의 대표 슬로건을 공모하면 수도라는 말을 비롯해 이 지역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문구가 대부분”이라며 “서울 중심으로 세상일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반작용일 것”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주위에서 흔히 보는 특별대△△라는 큼지막한 문구는 또 어떤가. 특별대세일 특별대공연 특별대탐사 특별대기획전부터 특별대성회(聖會) 특별대사면까지…. 특별하지 않으면 주목을 끌지 못한다는 좌불안석인 모습이 우리 시대의 자화상으로 비친다.
과장의 또 다른 모습은 길거리 ‘원조(元祖)’ 간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서울 장충동 족발 타운이나 신당동 떡볶이 골목에 한번 가 보시라. 대부분 여기가 원조라며 손님을 부른다. 정작 원조집은 원조라는 점을 그다지 강조하지 않는다는 ‘진짜 식별법’이 나도는 이유다.
요즘은 마당(정원이 아닌 텅 비어 있는 마당)을 보기가 참 어려운 시대다. 비워진 공간이 바로 옛 마당이다. 그곳은 당시 계층의 구별 없이 함께 사용하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마당처럼 빈 공간을 내는 것이 최근 건축계의 주목받는 양식이라고 한다. 도처에 쌓인 ‘채움 피로증’의 역발상인 셈이다.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은 종교를 뛰어넘어 많은 이에게 감동을 준 분들이다. 이런 힘의 원천은 결국 ‘비움의 미학’을 실천한 데서 찾을 수 있다는 얘기도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외국인의 눈에도 마당은 흥미진진한 곳이었나 보다.
지난주 한국에서 4년 임기를 끝낸 한 외교관의 환송식에 초대받았다. 한국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해남 땅끝마을 등 한국의 시골에서 봤던 마당과 그 속에서 느낀 소박함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며 말을 이어갔다.
과잉보다 비움을 통한 소박함에 마음이 끌리고 더 큰 감동이 느껴진다는 얘기였다. 한국이 채움(경제성장)에선 눈부신 성과를 거뒀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그의 지적이 아직 귓가에 쟁쟁하다.
휴가철이다. 올 휴가에는 “조금 놓아버리면 조금의 평화가, 크게 놓아버리면 큰 평화가 온다. 만일 완전히 놓아버리면 그만큼의 평화와 자유를 얻을 것이다”라는 달라이 라마의 말처럼 비우는 연습을 하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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