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제균]쿠알라룸푸르와 아인혼의 기억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8월 4일 03시 00분


처음 겪는 열대기후였다.

비행기 문을 나서는 순간, 훅 하고 끼얹는 습한 열기.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5월 한낮은 한마디로 습식 사우나였다.

1995년 외무부(현 외교통상부) 출입기자였던 나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미국과 북한의 준(準)고위급회담을 취재하러 갔다. 회담의 관심사는 7개월 전 타결된 미북(美北) 제네바 합의에 따라 북한에 제공하기로 한 경수로의 노형(爐型)을 한국형으로 하느냐였다.

14년 전 상황과 여전히 비슷

그런데 정작 한국은 회담에 참여하지 못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핵문제는 북-미의 문제’라는 북한의 ‘한국 배제’ 전략 때문이었다.

따라서 한국 기자들의 취재도 다소 기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뒷날 한국 대사를 지낸 토머스 허버드 미국 측 수석대표와 북한 측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이 진행한 그날 회담 결과를 미국 측이 한국 외무부에 브리핑하면 그 내용을 외무부 당국자에게 물어보는 게 기본적인 취재라인이었다.

일주일을 예상하고 떠났던 출장은 무려 한 달이나 끌었다. 습식 사우나에서, 사실상 ‘제3자’의 입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답답한 취재였다. 하지만 북한에 제공할 경수로를 사실상 한국형으로 합의한 것이 길고 지루한 취재의 보상이라면 보상이었다.

핵문제에서 물꼬를 튼 ‘미북 직거래’는 이듬해인 1996년 4월 독일 베를린에서의 미사일회담 개최로 이어졌다. ‘미북 미사일회담’은 본보의 특종 보도로 알려졌다. 그때 한국 언론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이가 바로 이번에 방한한 로버트 아인혼. 당시 미 국무부 정치·군사담당 부차관보였던 그는 북한의 이형철 외무성 미주국장과 함께 미사일회담 수석대표를 맡았다. 역시 한국은 끼지 못했다. 한국을 직접 위협하는 스커드 미사일 문제 등을 다루는 회담이었음에도.

벌써 14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비슷하다.

우리 영해에서, 북한의 어뢰 공격을 받아, 한국 전함이 침몰됐어도 우리는 지난달 방한한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의 입에 오히려 신경을 곤두세웠다. 14년 전 미사일회담 때처럼 아인혼 미 국무부 북한제재 조정관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하고 있다.

아니, 상황은 그때보다 훨씬 나빠졌다. 당시만 해도 북한 핵문제는 핵무기 1, 2개를 생산할 수 있는 양의 플루토늄을 보유했다는 ‘의혹’ 수준이었다. 이제는 ‘의혹’이 아니라 ‘현실’이다. 북한은 그사이 두 번의 핵실험을 감행했다. 최근 미국의 핵 전문지는 “북한이 핵폭탄 8∼12개를 제조할 수 있는 양의 플루토늄을 갖고 있다”며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했다. 미사일은 어떤가. 북한은 1998년 대포동1호(사거리 2000∼2500km), 지난해 대포동2호(사거리 5000km)를 발사했다.

미국의 어깨 뒤에 숨는 비겁함

14년 동안 한미의 대북 핵·미사일 정책이 총체적으로 실패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사이 10년 집권했던 좌파정권의 ‘대북 퍼주기’로 북한의 핵과 미사일은 무럭무럭 자랐다.

그러면서 우리 내부의 비겁함도 무럭무럭 자랐다고 나는 생각한다. 적어도 14, 15년 전에는 북한 핵·미사일 문제 논의에 한국이 ‘제3자’가 되는 데 대한 공분(公憤)이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우리의 젊은 병사 46명이 차가운 바다에 수장됐음에도 미국의 어깨 뒤에 숨어 클린턴 장관이나 아인혼 조정관이 한마디 하면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심리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역사는 미국도 ‘결정적 시기’에 한국을 포기했거나 떠나려 했던 적이 있음을 말해준다. 미국이 떠난다면 군사분계선(MDL)과 북방한계선(NLL)에 우리 홀로 설 수 있을 것인가. 이제는 자문(自問)할 때가 됐다.

박제균 영상뉴스팀장 phark@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