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진녕]이재오式나 홀로 선거운동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8월 4일 20시 00분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선거제도를 가졌다는 영국도 19세기 후반까지는 금권·향응 선거가 판을 쳤다. 1883년 부정타락선거방지법 제정이 그 이전과 이후를 갈랐다. 선거운동과 선거비용 지출이 엄격히 제한됐다. 존 메이저 전 총리가 1992년 총선 때 썼다고 공개한 선거비용은 우리 돈으로 1016만 원 정도다. 대부분 후원금과 일반당비에서 충당했고 그가 개인적으로 쓴 돈은 고작 20만3000원이었다. 법으로 이 정도의 선거비용만 쓰도록 제한하고 있으니 선거운동도 요란하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TV나 신문을 보지 않으면 선거 분위기조차 제대로 느낄 수 없다. 후보 알리기는 가정에 배달하는 홍보물이 거의 유일하다. 그렇다고 영국에서 민주주의 후퇴를 걱정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도 선거법이 엄격해지면서 과거에 비해 선거운동이 많이 차분해졌다. 대규모 청중을 동원하는 합동연설회와 정당연설회가 없어졌다. 향응·돈 선거도 거의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선진국에 비하면 요란한 편이다. 도처에 플래카드가 난무하고 거리의 유세차량이 쉴 새 없이 고성을 토해낸다. 지하철역 등에서는 유니폼 차림의 대여섯 명이 쭉 늘어서서 구호를 합창한다. 수십 명씩 떼 지어 다니며 홍보물을 나눠준다.

후보 스스로는 최선을 다했다고 자위할지 모르나 이런 방식은 돈이 많이 들고 사회적 에너지를 낭비한다. 갈등 유발이나 선거법 위반 같은 부작용도 따른다. 득표에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7·28 재·보선 때 서울 은평을에서 당선된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은 이와는 다른 선거운동 모델을 실험해 효과를 실증적으로 보여줬다.

그는 중앙당의 지원을 사절했다. 자신과 가족, 선거운동원 모두 혼자 다니며 선거운동을 했다. 안전 때문에 밤에만 2인 1조로 다녔다. 모두가 편한 차림으로 어깨띠를 두르고 명함을 나눠주며 인사만 했다. 대로(大路) 대신 골목길을 골라 다녔다. 로고송을 만들었지만 한 번도 틀지 않았다. 이 후보의 이동 수단은 주로 자전거였다. 유세차량은 선거 전날 하루만 이용했다. 선거사무실은 아예 폐쇄했고 참모회의는 필요할 때 호출해 길에서 5∼10분 하는 걸로 대신했다. 상대 후보를 자극하는 논평은 일절 내지 않았다.

야당은 그 반대였다. 민주당 장상 후보 선거대책본부 출정식엔 1000여 명이 참석했다. 정세균 대표, 손학규 정동영 상임고문 등 당 지도부가 총출동해 유세전을 거들었다. 이재오 후보를 정권 심판, 4대강 심판의 표적으로 세웠다. 당과 선대위 대변인들이 논평 세례를 퍼부었다. 이 후보의 선거운동 방식까지 문제 삼아 ‘골목길에 숨지 말고 대로로 나오라’고 빈정댔다. 후보 단일화가 이뤄지면서 민주당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에다 노사모, 박사모까지 가세한 5개 연합군이 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결과는 58.3% 대 39.9%로 이 후보의 압도적 승리였다.

선거와 민주주의는 불가분의 관계다. 그러나 선거와 선거운동은 엄연히 다르다. 민주주의 선진국일수록 오히려 선거운동은 차분한 편이다. 우리도 그런 추세를 쫓아왔다. 그러나 아직 멀었다. 이제 고비용, 갈등 양산 구조의 선거문화를 한 단계 더 개선할 때가 됐다. 투표율 저조를 걱정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 문제는 다른 방식으로 해법을 찾으면 된다. 이재오식(式) ‘나 홀로 선거운동’이 유일한 정답이랄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벤치마킹 사례로는 괜찮지 않은가.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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