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황창규]컨버전스의 역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8월 11일 03시 00분


2003년경 일본 굴지의 디지털카메라업체를 방문한 적이 있다. 카메라 기능을 휴대전화에 추가하는 초보적 ‘컨버전스(convergence·융합)’가 막 진행되던 시기였다. 그 회사 최고경영자(CEO)는 “디카 고유 시장의 미래가 불투명해질지도 모르는데 투자를 계속해도 좋겠느냐”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물었다. 카메라시장의 향방은 반도체 수요와도 직결돼 필자 역시 고민하던 터였다.

컨버전스가 심화할수록 이를 구성하는 개별 기기의 고유 시장은 더욱 특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며 자연스럽게 ‘다이버전스(divergence·개별 특화)’의 모습을 띠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 필자의 조언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디카에 대규모 투자를 감행한 그 회사는 이듬해 크게 성공했다. 1년 후 다시 방문했을 때는 회사 입구에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컨버전스란 개별적으로는 구현하기 어려운 가치를 ‘융·복합’을 통해 창출하는 행위다. 하지만 이것이 개별 기능의 소멸 내지 위축을 불러 온다면 본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보기 어렵다. 컨버전스를 통한 새로운 가치가 소비자의 감성을 자극하려면 기존의 개별 기능이 화학적, 전략적으로 ‘융·복합’돼야 한다. 그저 물리적으로 조합해 놓은 건 단순한 ‘결합’이다. 이는 제품의 기능만 복잡하게 만들어 소비자의 피로를 가중시키고 예전 단순 기능에 대한 향수에 젖도록 할 뿐이다.

폰카 맹위에도 디카 살아남아

인터넷신문과 종이신문의 관계도 유사하다. 인터넷신문이 활성화되면서 혹자는 종이신문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호들갑을 떤다. 하지만 인터넷신문 확산에 자극받은 종이신문이 예전보다 더욱 전문화된 섹션과 세련된 구성으로 어필하면 살아남을 수 있다. 필자 역시 인터넷신문에서는 맛볼 수 없는 종이신문의 매력을 포기할 수 없어 예전보다 더 꼼꼼히 종이신문을 챙긴다.

태블릿 PC가 스마트폰 시장을 잠식해 모바일 시장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 이것 역시 기우다. 약간의 경계 파괴가 예상되기는 하나 상대방의 발전에 자극받아 저마다 고유 시장을 넓혀갈 것으로 본다. 태블릿 PC는 스마트폰이 보유한 기능에 문서작업이 가능한 i워크스(iWorks) 기능, e북 기능이 추가되면서 출판 광고 교육 등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처럼 건전한 경쟁 관계 및 상호 시너지를 통한 상승작용이야말로 신(新)수요를 지속적으로 촉발시키는 힘이다.

컨버전스가 심화하자 시장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초(超)고화질의 디카가 개발됐으며 휴대전화에 추가된 MP3보다 많은 곡을 저장하면서도 더 가볍고 세련된 디자인의 MP3도 개발됐다. 컨버전스가 촉발시킨 ‘다이버전스 고도화(高度化)’의 전형이다.

국가 연구개발(R&D) 전략에도 이러한 관계를 대입해 볼 수 있다. 개별 프로젝트는 무수히 많은데 이들을 유기적으로 엮고 큰 방향을 제시하는 상위 개념의 기획이 취약하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다. 모두 자기 프로젝트에 열심이기는 한데 그것이 지향하는 큰 방향은 무엇인지, 국가 차원의 이른바 ‘메타플랜(Meta Plan)’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대답이 궁해진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은 국가 R&D 기획안을 세워 놓고 이를 바이블 삼아 모든 R&D 활동을 작동시키고 조율한다. 지금이라도 거시적 기획안을 조속히 수립하고, 모든 개별 프로젝트를 이를 중심으로 질서정연하게 재정렬해야 하는 이유다. 예컨대 ‘녹색(Green) 수송 시스템’은 이동 시스템 전체를 최대한 녹색화하자는 국가 거시 기획안이다. 이를 위해서는 그린카, 고속철 등 각종 운송수단은 물론이고 연료소비효율 향상 기술, CO₂ 저감 기술, 하이브리드, 클린디젤 기술 등 이질적인 요소가 초기 단계부터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화학적으로 결합돼야 한다.

융합은 개별 기술도 고도화한다

이게 다가 아니다. 도시 내 혹은 도시 간 이동성에 대한 전반적인 재설계는 물론이고 스마트그리드, 원전, 신재생 에너지, 충전시설 등 인프라의 재구축까지 망라된 ‘토털 녹색 수송 해법(Total Green Mobility Solution)’이 필수적이다. 이렇듯 개별산업 혹은 기술이 거시 기획안을 중심으로 최적의 결합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상호 긴밀히 통섭하는 ‘토털 솔루션’의 모습으로 거듭나게 된다. 개별 기술 역시 각자 영역에서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게 될 것이다.

기존의 것들을 죽이면서 진행되는 컨버전스는 독(毒)이다. 그 자체로도 당연히 빛을 발해야 하겠지만 기존의 것들도 더욱 발전시키는 컨버전스야말로 궁극적으로 지향할 목표다. 컨버전스를 통해 다이버전스를 더욱 고도화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컨버전스의 역설이자 컨버전스의 진정한 힘이다.

황창규 객원논설위원·지식경제부 R&D전략기획단장 cghwang@mke.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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