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10월 남덕우
서강대 교수가 재무부 장관에 취임했다. 콧대 높던 재무부 공무원들은 “행정도 모르는 교수 출신이 얼마나 버티겠어”라며 “곧 제풀에
나가떨어질 테니 몇 달만 엎드려 있자”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남덕우 재무장관 시대는 4년 11개월간 이어졌고 장관에서 물러나면서
바로 경제부총리로 승진했다. 그는 1978년 12월까지 9년 2개월이란 긴 세월 동안 경제 관료의 양대 산맥이던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을 이끌면서 1970년대 ‘한강의 기적’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1980년대 초에는 국무총리도 지냈다.
정책성과, 임기, 부처(部處) 장악력에서 가장 성공적인 교수 출신 고위 공직자로 꼽히는 ‘남덕우 신화’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개인적 역량이 1차적 요인이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를 발탁한 박정희 대통령의 과감한 인사 원칙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고심해서 각
부처 장관을 직접 고른 뒤 후속 인사는 주무 장관에게 맡기는 것이 박정희 스타일이었다. 남덕우는 업무를 파악한 뒤 차관 이하
간부들에 대한 능력 위주의 대규모 인사로 조직을 장악하고 필요한 정책을 하나하나 추진했다. 중간간부나 실무자 시절 그에게 인정받아
기회를 잡은 인재 가운데 상당수가 훗날 여러 경제부처 장차관으로 성장했다.
권부(權府)의 핵심인 청와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박정희 정부 시절 9년 이상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은 “비서관의 선발은 수석비서관이 직접 했다. 대통령은 군대를 갔다
왔는지 같은 기본적 조건만 물었다”고 증언한다. 박정희가 장관에게 위임하지 않고 직접 챙긴 인사는 당시만 해도 정치적 비중이 컸던
군 장성 인사 정도였다.
역설적인 일이지만 군인 출신 대통령 시대가 끝나고 민간 정치인들이 집권하면서 장관의
인사권은 오히려 약화되기 시작했다. 대통령 주변의 권력 실세(實勢)들이 행정부 인사에 개입하는 일이 부쩍 늘었다. 관료에 대한
불신감과 ‘민주화 투사’로서의 우월감, 정치적 타산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장관이나 차관들이 청와대에 포진한 새파란 386
운동권 출신 실세들에게 꼼짝 못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영악한 일부 젊은 공무원은 인사 때마다 외부에 줄을 대곤
했다. 과거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해 6월 국무회의에서 “앞으로 정무직을 제외한
각 부처의 실무 간부 인사를 장관에게 맡길 생각”이라고 밝혔다. 몇 달 전 만난 어느 장관에게 “부처 간부들에 대한 인사권을
얼마나 자율적으로 행사하느냐”고 묻자 “그 이야기는 그만 하자”는 답변이 돌아왔다. 다른 장관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며 입을
닫았다. 이 정부에서도 장관의 인사권은 낙제점을 면치 못하는 것 같다.
이달 13일 김희정 청와대 대변인은 “이번
차관 인사에서 부족한 점이 있으면 실장급 후속인사에서 보완할 예정”이라고 했다. 뒤집어 보면 각 부처 차관보나 실장 같은 1급
인사도 장관에게 맡기지 않고 청와대가 관여하겠다는 의미로 들린다. 1년 2개월 전 MB의 다짐은 어디로 갔나.
장관과 함께 정무직인 차관 인사는 대통령이 하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1급이나 국장, 과장 인사권까지
청와대가 움켜쥐고 놓지 않는다면 부작용이 훨씬 크다. 옥석(玉石)을 가려내지 못하고 ‘인사의 칼’을 잘못 휘두르는 장관이라면 그에
따른 책임을 물으면 된다. 장관에게 제대로 인사권도 주지 않고 뒷날 역사에 남는 명(名)장관이 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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