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거나 차를 타고 가다가 곡목도 모르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무슨 노래인지 모르고 흥얼거리다가 문득, 광고에서 자주 듣던 노래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 순간, 왠지 모르게 한숨이 나오고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광고에 세뇌당했다는 사실에 섬뜩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우리는 광고의 홍수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디지털 시대의 첨단기법으로 무장한 거센 광고의 물살은 자본주의 체제를 살아가는 인간을 물질의 노예로 전락시켜버린 지 이미 오래입니다. 천하가 광고로 뒤덮인 세상, 광고의 물살에 인간이 대책 없이 휩쓸려가는 걸 지켜보면서 성경의 시대에는 노아가 만든 방주라도 있었지만 이제는 무엇을 인간의 방책으로 삼을까 난감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현대인은 애 어른 가릴 것 없이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밤에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광고의 무차별한 공격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신문 텔레비전 인터넷 잡지 지하철 버스 빌딩 화장실 심지어는 휴대전화까지 원치 않는 광고가 마구잡이로 밀려듭니다. 광고가 인간의 욕망을 타깃으로 삼는다는 고전적 규정을 넘어 이제는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강제 수용의 양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사실이 인간적 삶의 입지를 더욱 불안하게 만듭니다.
21세기, 광고에 지배당한 인간은 인간성이 아니라 상품으로 자신을 무장합니다. 물질이 곧 인격이라는 등식을 제시하며 새로운 시대의 리더인 양 거리를 활보합니다. 신용불량자와 개인 파산자를 양산하는 사회, 냉혹한 자본체제에는 대량생산과 첨단기법의 광고가 있을 뿐 인간에 대한 배려는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적이 사라진 세상, 광고는 대중을 세뇌하고 조작하는 빅브러더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합니다.
인간이 광고의 덫에 치이고 광고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는 이유는 지극히 간단합니다.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남에게 보여지는 삶을 더욱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1920년대 미국 산업심리학계에서 내린 ‘자의식’에 대한 규정이 그것을 웅변으로 말해 줍니다. 자의식은 ‘내가 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아니라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한 나의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자의식은 실제의 나와 다른 ‘또 하나의 나’를 연출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반영하고, 광고는 바로 그것을 타깃으로 삼아 덫을 놓는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남에게 보여지는 나가 아니라 진정한 나를 위해 살면 광고의 덫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명품으로 치장하고 성형으로 무장한 인간의 나르시시즘은 결국 자아망실로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알맹이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겨지는 불행이 예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과 무관해진 나, 광고의 세뇌가 통하지 않는 나, 남에게 보여지는 껍데기보다 내면을 중시하는 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광고를 무시하고 광고를 무색하게 만들 수 있는 참다운 나가 많아지지 않는 한 인간다운 세상은 구현되기 힘듭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누구를 위해 나는 세상을 사는가, 자문해야 합니다. 진정한 나를 위해 사는가, 남에게 보여지는 나를 위해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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