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을 읽다 보면 대충대충 넘어가는 부분도 있고 주의 깊게 읽어야 하는 대목도 있다. 반대 당파에 대한 마구잡이식 비난이나 판에 박은 듯한 언관의 탄핵상소는 몇 줄만 읽어도 내용이 뻔하다. 결론만 읽으면 앞에 갖다 붙인 온갖 미사여구가 허황하게 느껴진다. 본문 기사보다 더 긴 사관(史官)의 논평, 특히 그의 정치적 관점이 강하게 개입된 사평(史評)을 읽으면 짜증이 난다. 아마도 그 사관은 스스로를 역사의 최종 심판자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몇백 년이 지난 지금 파당적인 그의 사평은 ‘태백성(太白星·금성)이 낮에 나타났다’는 한 줄 기사보다도 못하게 느껴진다.
반면 실록 중에는 밑줄을 쳐가며 읽게 되는 대목이 있다. 대표적인 내용이 기존의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으려는 시도다. 어전회의에서 전개되는 개혁 논의나 인물평 역시 흥미롭다. 옛 사례나 고전을 인용하면서 상대방을 논박하는 논쟁이 있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요즘 관심을 끄는 ‘공정’ 담론이 갑자기 몰아쳤다가 순식간에 사라져가는 태풍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수준을 확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세종실록을 다시 읽는다.
재위 11년째인 1429년 4월 9일 세종은 경연에서 신하들과 함께 책을 읽다가 무릎을 치며 말했다. “아, 진문공(晉文公) 곁에 관중(管仲)이 있었더라면 그 업적이 어떻게 되었을까.” 세종에 따르면 옛날 공자가 진문공은 속임수를 사용하는 군주로, 그리고 제환공(齊桓公)은 공정한 군주로 평가했다. 제환공이 공정한 군주로서 천하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관중의 지혜로운 보필 덕분이었다.
불공정 사례 신하들에 묻고 시정
“그런데 내가 두 군주의 사적을 비교해보니 진문공의 패권 기간이 제환공보다도 더 길었다.” 요컨대 진문공처럼 의욕적인 군주가 관중 같은 인재를 얻어 공정한 방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면 중국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는 게 세종의 생각이었다. 실제로 세종 스스로가 매우 의욕적인 임금이었고 황희나 허조와 같은 지혜로운 재상을 등용해 장기간 보필하게 했다.
세종은 어떤 인물을 공정한 관료로 보았고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나? 그에 앞서 1420년 윤1월에 여러 신하가 이야기한 ‘불공정한 사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종은 국가에서 잘못하는 일을 지적해 달라는 구언(求言)교지를 신하에게 내렸는데 모두 16가지가 보고됐다.
대표적인 일이 수령 아전의 권한남용과 가혹한 세금징수다. 이 중에서 수령이 사무 처리하는 것만을 능사로 삼고 형벌을 엄하게 하여 위엄을 세우려 하며 백성의 이해에 대해서는 돌아보고 생각하지 않는 관리 탓에 백성 사이에 원망이 가득 차 있다는 지적은 지금도 공감 가는 대목이다. 민원인에 대한 공무원의 태도가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지금보다 두 배는 더 친절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후자인 세금징수 문제는 맹사성이 지적했다. 그는 국가에서 빌려준 곡식을 못 받으면 친척에게 물리고 있는데 이것은 어진 정치가 아니라며 전액 면제를 요청했다. 먼저 베풀어주어야 그 마음을 얻는다(與之爲取)는 관중의 정치 비결을 제안한 것이다. 세종은 이를 받아들여 “이웃에서 대출받은 가족이 모두 죽은 것으로 인정할 경우에 전액 면제하라”고 지시했다. 공정한 공직자의 최고 덕목은 나라의 근본인 일반 백성을 섬기는 데 있음을 맹사성과 세종이 실천으로 보인 셈이다.
다음으로 세종은 스스로가 먼저 공정한 자세를 견지했다. 부왕 태종이 양녕대군에서 충녕대군(세종)으로 세자를 교체하면서 “세자를 세우는 것은 인심에 관계된다. 세자는 나라의 근본이니 오로지 지극히 공정한(至公) 마음으로 나랏일에 임하라”라고 당부했다. 당부 때문인지 세종은 백성의 아픔을 먼저 헤아렸고 자신을 뒤로했다. 쇠약해진 왕의 건강을 위해 약주를 권하는 신하들에게 그는 “가뭄으로 백성들에게 금주령을 내려놓고 나만이 예외로 술을 마셔서야 되겠느냐”며 단호히 물리친 것이 한 예다.
자신보다 백성의 아픔 먼저 헤아려
“술을 금지할 적마다 청주(淸酒)를 마신 자가 죄에 걸린 적이 없고 탁주(濁酒)를 마시거나 혹은 술을 매매한 자만 법에 걸리니 사정이 딱하다. 금주기간이라도 가족행사를 위해서나 늙고 병든 사람이 약으로 술을 마시는 경우는 처벌하지 말라”고 서민의 처지를 배려한 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세종은 이처럼 중요한 판단을 하고 결정을 내릴 때 나라에서 가장 취약한 처지의 사람을 먼저 생각했다. 버려진 아이, 무시당하는 노인, 그리고 힘없는 노비가 이 결정을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데서 지도자의 공정한 판단 기준이 나온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올바르게(正) 다스린 임금이라는 그에 대한 최후평가는 바로 이 점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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