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장환수]박찬호에 대한 유쾌한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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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0월 1일 03시 00분


‘헐크’ 이만수는 SK 코치지만 삼성 팬들에겐 여전히 영웅이다. 대구를 떠난 지 13년이나 됐는데도 말이다. 대구 관중은 최근 양준혁의 은퇴 경기 때조차 적장인 이만수의 모습이 보이자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그를 향한 그리움에 삼성에서 쫓겨나다시피 옷을 벗은 데 대한 동정심이 더해진 때문이었다.

당대 최고의 홈런타자 이만수와 방망이를 거꾸로 잡아도 3할은 친다는 ‘양신(梁神)’ 양준혁. 삼성 구단이 둘을 떠나보낸 방법은 영 딴판이었다. 양준혁은 은퇴 경기뿐 아니라 국내에선 유례가 없는 공연에 가까운 은퇴 퍼포먼스까지 하는 영광을 누렸다. 반면 이만수는 은퇴 경기조차 하지 못했다.

이만수는 1993년 시즌이 끝난 뒤부터 은퇴 압력을 받았다. 1992년 22개(6위)였던 홈런은 5개로 뚝 떨어졌다. 이만수는 연봉 대폭 삭감의 수모를 감수하면서도 39세였던 1997년까지 꿋꿋하게 버텼다. 결국 이게 화근이 돼 다시는 삼성의 푸른 유니폼을 입지 못했다. 떠날 때를 안 양준혁과 그렇지 못한 이만수의 차이였다.

이처럼 은퇴 시기와 방법은 매우 중요하다. 슈퍼스타의 경우엔 특히 그렇다. ‘갈색 폭격기’ 차범근은 당시 세계 최고 리그였던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10년간 뛰며 정규 리그 308경기에 나가 98골을 넣었다. 3경기당 1골을 넣는 페이스. 아시아 선수 가운데 전무후무한 기록이었다. 독일의 미하엘 발라크, 포르투갈의 루이스 피구, 잉글랜드의 마이클 오언은 우상인 ‘차붐’의 경기를 보며 축구에 대한 꿈을 키웠다. 차범근은 여전히 허벅지가 단단한 1989년 유니폼을 벗었다. 100골에 대한 미련이 남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아직 뛸 수 있다고 남들이 인정할 때 떠난다”는 쿨한 답변을 남겼다.

현재 삼성 사령탑인 ‘태양’ 선동열도 일본 주니치와의 재계약과 메이저리그 진출을 놓고 고심하던 1999년 겨울 갑자기 은퇴를 선언했다. 주니치에서 2년 연속 1점대였던 평균자책이 ‘2점대로 오르자’ 내린 결정이었다. 선수로서 이룰 건 다 이룬 그이지만 공교롭게 그 역시 주니치에서 98세이브에 그쳐 아쉬움이 남았다.

반면 피츠버그의 ‘코리안 특급’ 박찬호는 일본 노모 히데오의 아시아 선수 메이저리그 최다승 기록을 깨기 위해 4년째 선발도 아닌 불펜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123승으로 타이를 이룬 그는 이제 1승만 더하면 신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를 두고 일부에선 비난의 목소리도 있지만 기자의 생각은 다르다. 박찬호는 전성기 때보다 지금이 훨씬 멋있다. 그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다. 그는 한국 야구 100년사의 신기원을 열었지만 국내 야구인들 사이에선 적이 더 많았던 게 사실이다.

내년에 38세가 되는 박찬호는 차범근 선동열이 은퇴했을 때 나이보다 많다. 하지만 그의 체력은 여전하다. 박찬호가 기록을 세운 뒤 다만 1년이라도 국내에서 뛰어준다면, 그래서 더도 말고 10승 10패만 해준다면 국내 프로야구의 흥행과 본인의 한국 연착륙을 위해서 더 바랄 나위가 없어 보인다. 영웅이라고 박수 칠 때 떠나란 법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심심치 않게 트레이드설이 나오고 열심히 그라운드를 누볐지만 예전과는 달리 최저 평점을 받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박지성, 2군 밥이 익숙해졌고 요미우리와 4년 계약이 곧 끝나는 이승엽도 이제 슬슬 멋진 마무리를 생각해야 할 시점이 된 것 같다.

장환수 스포츠레저부장 zangpab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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