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이 11월경부터 판매할 새로운 서민금융상품의 골격이 지난달 29일 공개됐다. 그동안 서민금융에 소극적이었던 은행권의 행태를 떠올리면 박수를 쳐줄 일이다. 그러나 이 서민금융상품을 내놓기까지의 과정을 뜯어보면 뒷맛이 개운치 않다. 은행이 진정성을 가지고 서민 지원에 나서는 게 아니라 정치권의 으름장 때문에 마지못해 하는 모양새가 됐기 때문이다.
출발은 이랬다. 8월 2일 시중은행의 대출 담당자들은 은행연합회에서 서민대출상품 공동 개발을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가동했다. 금융당국의 요청에 따른 것이지만 당시로서는 은행권도 서민금융상품을 개발할 필요성이 컸다. 은행권의 주력 서민금융상품인 희망홀씨대출이 후발 주자인 햇살론의 인기에 밀리고 정부 보증까지 중단되면서 ‘죽은 상품’이 됐기 때문이다. 금융권의 맏형이면서 고비 때마다 정부의 공적자금을 받은 은행권이 서민금융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 책임감도 있었다.
TF 관계자들도 대의에는 공감했다. 그러나 각론으로 들어가면 “정부 보증이 없으면 제살 깎아먹기 경쟁이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개별 은행의 이기주의 때문에 상품 개발은 진척되지 못하고 2개월이 흘렀다.
은행권이 허송세월을 보내는 동안 정치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나라당 홍준표 최고위원이 주도하는 서민정책특별위원회(서민특위)가 “은행 영업이익의 10%를 서민대출로 전용하도록 법제화하겠다”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지난달 9일이었다. 서민특위 안대로 법제화되면 위헌 소지가 있을 뿐 아니라 은행으로서는 경영권까지 침해당하게 된다. 은행권으로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다.
결국 은행연합회 고위 관계자들은 지난달 29일 홍 의원을 찾아가 2개월간 논의한 서민금융상품 도입방향을 보고하고 법제화만은 참아달라고 사정했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정작 대출상품을 취급할 은행들의 최종 동의는 받지도 못한 채 국회를 찾아야 했다. 정치권은 마지못한 듯 이 요청을 받아들여 법제화를 일단 유보했다.
정치권은 실리를 챙겼고 은행권은 법제화를 막은 것처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서민금융상품 개발에 늑장을 부렸던 은행, 정치권의 압박에 설익은 대책을 내놓은 은행연합회를 보면 한국 금융의 현실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스스로 서민금융상품을 내놓겠다고 했으면서도 2개월을 끌다가 정치권이 숨통을 조여 오자 “자율적으로 하겠습니다”라며 손들고 나선 은행권은 이번 기회에 심각히 자문해 보길 바란다. 그토록 비판했던 관치(官治)금융을 자초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