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 똥돼지와 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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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0월 3일 20시 00분


이젠 면역될 만도 한데 안 된다. 자녀문제가 걸리면 모두 신경이 곤두선다. 지난 주말 행정안전부가 발표한 외교통상부의 고위층 자녀 특채 진상은 청년 백수뿐 아니라 자식 가진 부모까지 분노케 했다. 명절 때도 부모 볼 낯이 없어 고향에 못 온다던 무권무직(無權無職) 자식에게 이젠 ‘부모 잘못 만나게 한 죄’를 빌게 생겼다.

공직에 자녀 특채는 부패행위다

‘족벌주의(nepotism) 스캔들이 남한에 출몰했다’는 지난주 중국의 신화통신 영문판 기사를 보면 우리끼리는 다 아는 얘기여도 낯이 뜨거워진다. 유명환 외교부 장관의 딸 특채로 워낙 공직자의 도덕성에 대한 의구심이 뿌리 깊은 이 나라에 파문이 번지고 있고, 여론조사마다 사회 공정성을 믿는다는 사람이 거의 없으며, 이명박 대통령의 ‘공정한 사회’ 드라이브는 허구성을 드러냈다는 지적이다. 외교 수장이 결국 나라를 망신시킨 셈이다. 한 달 전 ‘부정 특채’ 사실이 밝혀진 그의 딸은 ‘똥돼지’ 스캔들을 퍼뜨린 주인공이 됐다.

똥돼지란 부모 ‘빽’으로 정부기관이나 공기업, 대기업에 특혜 채용된 고위공직자 자녀를 말한다. 이런 특채가 너무 많아서 전담팀까지 둔 한 기업 인사팀에서 쓰는 은어라고 한다. ‘낙하산’ 같은 말은 차라리 소박해 보일 만큼 노골적 경멸과 반감이 배어난다. 그게 국민의 현재 감정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 것처럼 족벌주의는 인간 본성일 수 있다. 이지서베이가 최근 직장인 681명에게 물은 조사에서 직장인 넷 중 하나가 “낙하산과 근무 경험이 있다”고 밝혔듯 사람 사는 세상 어디에나 빽으로 입성한 사람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국민 세금으로 봉급 받는 공직은 다르다. 국가기관을 사유물로 여기고 제 자식을 통해 세금을 빼돌리는 일종의 부패행위다. 규정을 멋대로 어기고 자녀를 집어넣은 공직자 때문에 더 유능한 공복(公僕)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밀려났으니 국리민복에 해를 끼친 국정 농단이 아닐 수 없다. 구글 영문판으로 최근 족벌주의 기사를 검색하면 우리나라를 빼곤 거의 아프리카 파키스탄 이라크 같은 후진국이다. 나라 위신을 추락시킨 죄도 면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용서하기 힘든 대목은 신분제를 부활시켜 이 땅의 보통 부모들에게 죄책감을 안긴 점이다. 헌법은 ‘사회적 특수 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고 했다. 유 전 장관처럼 딸이 받은 특혜가 특혜라는 개념도 없이 단지 능력이 있어 뽑혔다고 믿고, 심지어 잘못을 안 지금도 국정감사 불출석을 고집하는 건 전형적 특권층의 오만이다.

특채 비리, 더 철저히 감사해야

부모들이 낙담하면 젊은 세대라도 낙관적이면 좋으련만, 매사에 비판적인 그들은 한술 더 뜬다. 지방대 의대에 다니는 한 여대생은 “우리 학교에선 부모가 의사이면 성골, 친척이 의사이면 진골, 아는 사람 중 의사가 있으면 육두품, 비빌 언덕 없이 의대에 간 나 같은 사람은 천민”이라고 말해 자식 의대 보내놓고 뿌듯해하던 부모의 억장을 무너뜨렸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론 부모가 고위공직자이면 성골, 사회적 배려대상자이면 진골, 여야가 앞 다퉈 마련한 혜택을 받게 될 서민이면 육두품, 이도저도 아니면 천민으로 살아야 할 판이다.

정부는 이번 사건이 2012년 아닌 지금 터진 것을 고맙게 여길 필요가 있다. 이번 기회에 똥돼지 현상을 뿌리 뽑지 않으면 국민의 신뢰 회복은 어려울지 모른다. 자녀의 공직 특채는 공직자가 위장전입으로 아이들 좋은 학교 보내는 차원을 뛰어넘는 문제여서다.

똥돼지의 부모들은 자녀 뒷바라지의 영역을 대학 입학을 넘어 취업까지, 결혼시킨 뒤 심지어 사위까지 챙기는 특권층의 모델을 드러내 보통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위장전입과 달리 이건 모방도 할 수 없다. 대대손손 벼슬을 잇겠다는 신분 집착도 문제지만 공직을 발판 삼아 더 높은 신분으로 상승시키겠다는 배부른 태도는 국민 반감에 불을 지른다.

그런데도 행안부가 외교부만의 감사로 특채 문제를 끝내는 건 납득되지 않는다. 지난 10년간 정부가 특채한 공무원 수가 같은 기간 전체 공무원 채용의 40%다. 2005년 말 부처별 자율 특채가 가능해지면서 ‘관계자’가 아니면 언제 특채 공고가 난 줄도 모르고 지나가는 판에, 온 나라를 들쑤신 똥돼지가 달랑 외교부에만 열 십(十)이라는 건 믿기 어렵다. 행안부가 지난 5년간 중앙부처 5급 특채에서 적발한 부적절 사례가 11건이라는 것도 신뢰를 떨어뜨린다. 외교부에서만 뒤늦게 드러난 비리가 10건인데 어떻게 감사했기에 고작 11건을 밝혀냈단 말인가.

김황식 총리는 한 달 전 감사원장 시절 중앙정부와 지자체 인사채용 특별 감사 계획을 밝힌 것을 기억할 것이다. 총리가 된 전 감사원장과 감사원의 명예를 위해서도 특채 감사는 철저히 실시되고, 국민 앞에 낱낱이 보고돼야 한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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