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에 가담한 민병대가 싸늘한 목소리로 “당신은 이제 인민의 손아귀에 있소!”라고 했지만, 차우셰스쿠는 도무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구라고?”
그는 루마니아 인민의 아버지였다. 민병대와 경찰의 급보를 받고 제64공수연대 병력이 도착했을 때도 차우셰스쿠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처형에 자원한 한 병사는 “그는 우리가 그를 구하기 위해 온 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아니 나의 아버지였으니까….” 병사는 그렇게 회고했다.
이튿날 약식 군사재판이 열렸다. 1989년 12월 25일, 하필 크리스마스였다. 검사는 차우셰스쿠의 죄목을 열거한 뒤 마지막으로 “나는 사형에 반대하지만 지금 우리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번만은 예외로 하고 싶다”고 했다.
인민들이 등진 루마니아 독재자
재판에 소요된 시간은 불과 2시간. 재판이 끝나자마자 병사 3명에게 30발의 자동소총 탄알이 지급됐고, 곧이어 어지러운 총소리와 함께 차우셰스쿠와 그의 아내 엘레나의 무릎이 꺾였다. 형장도 아닌 군사기지 뒷마당에서였다.
김정은 세습극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장면은 ‘루마니아의 김일성’이라고 불리는 차우셰스쿠의 최후였다. 김정일은 이듬해인 1990년 초 측근들에게 여러 종류의 차우셰스쿠 비디오를 돌려보게 하면서 “우리도 인민에 의해 처형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다. 뉴스위크는 2004년 12월 어느 탈북자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보도하면서 “김정일 자신은 어떤 환상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 하나는 믿어줘야 한다. 그는 상황을 분명히 알고 있다(He knows the score)”고 분석했다.
당시도 쓴웃음이 새어나왔지만, 순진한 분석이다. 하긴 독재권력의 정보부에 납치돼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DJ도 김정일을 만난 뒤 ‘총명한 지도자’ 운운했으니 서방언론이 그런 분석을 내놓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싶다.
인민을 떠난 권력은 일종의 사이코패스(Psychopath)가 되고 만다. 일견 멀쩡해 보이지만 그건 착각이다. ‘독재자의 최후’를 쓴 샐리 클라인은 유대국의 헤롯 대왕(재위 기원전 37년∼기원전 4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갔지만 우리는 그럴 필요도 없다. 1979년 부마(釜馬) 민주항쟁이 불타오르자 박정희를 지키던 차지철은 “그까짓 놈들, 각하, 캄보디아에서는 200만 명도 죽였는데 탱크로 밀어버리면 됩니다”라고 호언한다. 필자는 그때 부산의 고3학생이었다. 역사가 차지철의 말대로 움직였다면? 생각만 해도 등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北김일성 왕조의 최후는?
박정희 18년엔 그래도 김재규 같은 ‘워치 독(watch dog)’이 있었다. 차우셰스쿠 24년엔 그마저도 없었다. 차우셰스쿠와 함께 최후를 맞지 않으려고 멀쩡한 다리에 깁스를 하고 도망갈 궁리에 몰두하던 측근 장군, 헬기로 탈출 도중 “대공사격을 받고 있다”는 거짓말로 차우셰스쿠 부부만 내리게 한 뒤 자기는 기지로 달아나 버린 장교가 있었을 뿐이다. 인민이 떠날 때 김정은의 장군들은 어떨까.
며칠 있으면 노동당 창건 65주년(10월 10일)을 맞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 왕조의 마지막 순간은 그보다 더 ‘초현실적 스냅’이 될 게 분명하다. 차우셰스쿠 비디오는 이미 김정일의 머릿속에 있지 않다. 아니 원래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정부 당국자들이나 전문가들은 독재왕조의 최후에 대해 직설법을 아끼고 있지만 그렇다고 올 것이 안 오는 건 아니다. 두렵고, 창피하고,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현실이지만 역사의 교훈은 그런 희망마저 허락하지 않는 것 같다. 그나마 북이 한민족이길 거부하고 ‘김일성 민족’임을 고집하고 있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일까.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