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성원]손학규의 집토끼와 산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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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0월 6일 20시 00분


손학규 민주당 대표는 10·3 전당대회에서 대표로 선출된 직후 “진보의 제(諸) 정당, 시민사회와 연대·통합하고, 지난 대선 때 한나라당을 찍은 중도세력을 끌어안을 것”이라고 했다. 김대중(DJ)·노무현 전 대통령의 집권전략을 벤치마킹하는 듯하다.

미국에서도 경선 때는 각각 민주당과 공화당 후보들이 지명을 받기 위해 자기 당의 이념·노선의 충실한 계승자임을 입증해 보이는 선명성 경쟁을 편다. 본선에서는 양당 사이의 중간층 혹은 무당파층을 끌어들이기 위해 더욱 유연한 자세로 접근한다. 1992년 대선에서 민주당 빌 클린턴 후보가 ‘거대정부 시대는 끝났다’며 공화당식 용어로 무장한 것이나, 2000년 대선에서 조지 W 부시 후보가 ‘다른 종류의 공화당원(a different kind of Republican)’을 자처한 게 대표적이다.

하지만 손 대표는 아직 민주당의 대선잠재후보 중 한 명에 불과하다. 그의 전대 득표율은 5분의 1(21.37%)에 그쳤다. 이번에 당권을 차지함으로써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뗐다지만 호남 텃밭의 지배주주들이 1년 반 뒤 대선후보 경선에서까지 양자(養子)를 계속 밀어줄지 미지수다. 호남 민심은 필요에 따라 비호남 출신도 과감히 받아들이는 ‘전략적 선택’을 했다. 이는 거꾸로 대선 승리를 가져다주기 어려워 보이는 주자라면 하루아침에 버릴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인제 의원이 산 증거다.

DJ는 확고한 당내 기반과 광범위한 재야 지지세력이 있었기에 보수원조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와 연합해도, ‘뉴 DJ 플랜’을 들고 나와도 의심하는 집안 식구가 없었다. 노무현은 ‘꼬마민주당’을 거쳐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라는 집단 자격으로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해 정통성 시비에서 자유로웠다. 손 대표가 당선되자마자 ‘이명박 정권의 폭정’ ‘이명박 정부에 선전포고’ 등 전투적 용어를 동원한 것도 취약한 당내 기반을 의식한 ‘야성(野性)’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향후 대여 관계에서 손 대표가 정세균 전 대표 이상의 강공을 펼 가능성도 있다.

손 대표는 ‘지난 대선 때 잃어버린 600만표를 되찾아오겠다’는 꿈을 실현하려면 당내의 혹독한 정체성 테스트를 통과해야 하는 처지다. 당 밖의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장관을 비롯해 범야권 주자들과의 경쟁도 피할 길이 없다. 문제는 손 대표가 이른바 진보진영 내에서 입지 확보에만 치우치다 보면 중간층까지 끌어오겠다는 그의 브랜드가치를 잃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친(親)서민’ 드라이브를 통해 대통령 지지율을 50%까지 끌어올리며 중간층과 민주당 지지층 일부까지 파고든 상황이다.

손 대표가 ‘집토끼와 산토끼’ 사이의 딜레마에도 불구하고 당장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 현안이 속출하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국회비준이냐 재협상이냐, 북한의 3대 세습과 핵개발 재개에 대한 비판이냐 침묵이냐, 북한의 천안함 공격에 대한 규탄이냐 모른 척하기냐…. 그가 진짜 ‘민심의 바다’에 제대로 뛰어들어 국민과 민주당의 거리를 좁히고 ‘호랑이 민주당’을 만든다면 야권 대선주자로서 입지 확보는 물론이고 여당의 대선경쟁 구도까지 바꿔놓을지 모른다. 반대로 낡은 이념의 틀에 스스로를 가두고 민주당 안팎의 기득권 세력의 포로가 되어 ‘고양이 민주당’을 만든다면 손학규식 정치실험은 허망한 일장춘몽으로 끝날 것이다.

박성원 논설위원 sw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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