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의 학자 26명으로 구성된 한일(韓日) 신시대 공동연구위원회가 어제 발표한 보고서는 한일관계의 미래를 위한 의미와 함께 뚜렷한 한계를 보여준다. 양국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인권 등의 가치를 공유하는 동북아시아의 주요국으로 양자 간 협력을 넘어 글로벌 이슈 해결을 위해서도 힘을 합쳐야 한다. 양국은 미래 지향적 협력을 위해 과거와 현재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공유해야 하는 특수한 관계다. 더구나 올해가 한일강제병합 100년이라는 연대기적 의미를 고려하면 지금까지와 다른 획기적 과거사 인식이 가해국인 일본으로부터 나와야 할 때다.
그러나 강제병합에 대한 공동연구위의 인식은 올 5월 양국 지식인들의 공동성명에 크게 못 미친다. 당시 일본 지식인 104명은 한국 지식인 109명과 함께 ‘병합조약은 대한제국 황제로부터 민중에 이르기까지 격렬했던 항의를 군대의 힘으로 짓누르고 실현시킨 불의부정(不義不正)한 행위였다’고 명시하고 병합조약이 원천무효라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양국 지식인들은 일본 정부에 이 같은 역사의 진실 수용을 촉구했다. 동참 지식인이 늘어나 최근까지 일본에서 560여 명, 한국에서 590여 명이 참여했다.
이번 한일 학자 보고서는 ‘일본은 무력을 바탕으로 한국인들의 반대를 억누르고 한국병합을 단행했다’고 언급하는 데 그쳤다. 과거 일본의 불법행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무거운 역사적 멍에를 짊어지고 지평선 너머 밝은 미래를 내다보자’고 하는 것은 공허한 수사(修辭)로 들린다. 과거의 진실을 분명하게 인정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과거를 잊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강제병합이 ‘강박에 의한 불법조약’임을 일본 측이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직도 진정 어린 국가적 반성이 미흡함을 뜻한다.
연구위가 선정한 21개 어젠다에도 국민적 논란을 부를 사안이 담겨 있다. 양국 전문가들이 해저터널 추진을 포함시킨 것은 성급할뿐더러 오해의 소지가 크다. 한일 해저터널의 뿌리는 일본 군국주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은 1940년 미국 잠수함 등의 해상공격을 받지 않고 대륙 쪽으로 군수 물자를 실어 나르는 ‘불침(不沈) 항로’를 확보하기 위해 해저터널 공사를 계획했다. 이런 과거를 외면하고 해저터널을 미화해 양국 정상에게 보낸 보고서에 포함시킨 것은 부적절하다. 일본 측과 특정 종교단체의 해저터널 추진 로비에 대한 풍설도 적지 않게 퍼져 있는 상황이다. 터널이 양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필요한 점이 있다 해도 국민적 논의와 컨센서스 구축 과정이 선행돼야 한다.
연구위는 한일 정상의 합의에 따라 출범해 작년 2월부터 20개월간의 논의를 거쳐 보고서를 만들었다.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도 문제의 소지가 많은 건의를 내놓은 것은 유감이다. 양국 정상이 이 보고서를 토대로 ‘한일 신시대 공동선언’을 하려면 대폭적인 보완과 수정, 그리고 국민의 합의 과정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