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시절 함께 문학을 공부했던 친구한테 전화가 걸려와 만나기로 해놓고 나는 막상 고민에 빠져버렸다. 삼십몇 년 만에 만나 서로 무슨 얘기를 나눌지 막막했던 것이다. 사람은 함께했던 시간보다 헤어져 있던 세월이 길수록 그 간격을 해소하기가 힘들다. 공유할 만한 사안을 찾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친구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문학을 그만두었고 어느 날 슬그머니 나와의 연락을 끊어버렸다. 필시 겉도는 얘기를 주고받다 결국 씁쓸하게 헤어지게 되겠지. 나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약속 장소로 나가면서 나는 약간의 긴장까지 했다.
미리 얘기하자면 그날 나는 아주 뿌듯한 마음이 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나 자신과 과거의 시간을 되찾은 기분으로. 친구는 삼십 년 전에 나와 주고받았던 수십 통의 편지를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최근에 이삿짐을 정리하면서 해묵은 편지를 꺼내 읽다 문득 내 생각이 났다는 말이었다. 그랬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1970년대 말을 포함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편지를 주고받는 일이 가장 아름다운 소통의 방식이었다. 물론 전화가 있었지만 편지라는 보다 사적이고 은밀한 고백의 형식을 통해서만 비로소 교감이 가능한 영역이 존재했었다.
편지 주고받으며 교감했던 사람들
당시 나는 많은 문우(文友)들과 편지를 주고받았고 나 역시 지금껏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밤에 쓴 편지를 들고 우체국으로 갈 때 올려다본 푸른 하늘의 빛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거니와, 언제 답장이 오나 싶어 대문에 달린 우편함을 열어보던 순간의 설렘과 기다림이 아득한 그리움이 되어 가슴에 남아 있다. 그들도 아마 그러했으리라. 그때 주고받았던 편지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대로 실록(實錄)이 되었고 또한 청춘의 비밀한 유사(遺事)로 남았다. 더불어 그 시절이 술자리에서만큼은 신화처럼 부풀려 구전되기도 했다.
얼마 전 방송국에서 일하는 문단 선배를 만난 자리에서 내가 물었다.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거 요즘 유행하는 스마트폰 아녜요? 그런데 그거 꼭 필요한 건가요? 그러자 선배는 대뜸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만 편리해서 쓰지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다는 뜻이었다. 흠, 그렇군. 일명 삐삐라 불리던 호출기가 유행하던 시절에도 나는 바로 그 ‘호출기’라는 낱말이 주는 뉘앙스에 거부감을 느껴 사용을 금했고, 인터넷이 상용화되고 나서도 그 효율성은 인정하면서 사용 범위에 관해서는 얼마쯤 거리를 두고 살아왔다. 무엇보다도 디지털이라는 가상세계에 접속해 혼자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지금 내가 살아가는 세상과 소통하고 싶지 않았다.
온라인상으로 주고받는 메일과 블로그, 페이스북, 트위터 같은 소셜 커뮤니티에 대해 새삼스럽게 문제 제기를 한다는 일 자체가 이미 시대착오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대체로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하며 고유한 내면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익명, 익면의 상태로 이뤄지는 관계 맺기의 방식이 과연 진정한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인간적 가치의 실현이라는 삶 자체의 속성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필리프 브르통은 인터넷에 대한 열광이 일종의 종교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고 경고한다. 디지털 시대에 있어서 인간은 정보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 장치에 흡수되는 현상을 낳고 있다는 것이다. 18세기 근대 자본주의가 시작되고 나서 생긴 말 중에 오늘날에도 우리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두 단어가 있다. 개인과 고독. 이들 단어가 갖는 폐쇄성을 극복하기 위해 인류는 끊임없이 소통의 방식을 고민하고 문학을 통해 그것을 가까스로 해소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에 대한 일방적 신뢰와 일상적 사용이 어쩌면 도구가 주체가 되는 현상을 불러올지 모른다. 그것이 없으면 더는 삶을 지속할 수 없는 현실 말이다. 저장용량이 부족해 주기적으로 삭제해야 하는 방식으로는 알다시피 그 어떤 소통의 기록도 유사도 신화도 남지 않는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남김으로써 자기 존재를 증명한다.
최첨단 시대에 소통의 부재라니
인터넷이라는 가상세계에 접속해 있는 상태를 우리는 ‘온라인’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거꾸로 현실 속에서 실제적인 만남이 이뤄지는 상태를 ‘오프라인’이라고 부른다. 이는 분명 잘못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로 눈빛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곧 온(ON)의 상태가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최첨단의 소통 장치를 공유하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역설적으로 ‘소통이 화두인 시대’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역시 진정한 소통이란 기다림이 필요하고 설렘과 그리움이 수반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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