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했던 일 중 가장 뜻깊은 것을 들라면 나는 ‘파이넥스 실록화 작업’을 꼽겠다. 몇백 년 전 인물의 언행을 지금 보아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조선왕조실록처럼 포스코가 이뤄낸 세계 최고의 파이넥스 제철공법의 탄생과 난관, 극복 과정을 사료화해 달라는 게 과업지시서의 내용이었다. 국내외 학자가 연구자료로 이용할 수 있고 기업교육의 콘텐츠로 활용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이었다.
우리 팀은 먼저 구술작업을 진행했다. 이어 동영상과 문서자료 등 이른바 사초(史草)를 모으는 1단계를 마무리하고 실록의 편제에 따라 총서, 본문(연대기), 부록으로 편집했다. 총서는 연구의 목적과 배경을 개략적으로 기술했고 본문은 파이넥스 공법, 즉 종래의 용광로를 거치는 쇳물 제조과정 중 일부를 생략할 수 있는 혁신적인 제철기술을 개발하기까지의 과정을 시기별 사안별로 기록했다. 부록은 실록의 행장과 지문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파이넥스 주역의 가족과 포스코 내외부 사람의 평가로 이뤄졌다.
가장 흥미를 끄는 대목은 주요 행위자의 헌신과 집단몰입 과정이었다. 1992년 처음 연구팀을 발족해 2007년에 세계 최초의 파이넥스 상용화 설비를 가동하기까지 15년의 기간은 땀과 눈물로 점철된 인고(忍苦)의 시간이었다. 동영상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해지는 대목은 2003년의 인명사고 때다. 새로운 쇳물 제조기술을 개발하려고 수백 번도 넘게 실험하는 과정에서 쇳물이 터져 나와 사원 1명이 죽었다. 침통한 분위기를 바꾼 것은 사원 아버지의 말이었다.
포스코의 뜻깊은 ‘파이넥스 실록화’
그 말은 “내 아들이 시골집에 오면 늘 한국역사 5000년에 처음 있는 일을 한다고 말하던데, 정말이냐?”는 물음이다. L 공장장은 “예, 정말로 의미 있는 일 맞습니다. 반드시 성공시키고 말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침통한 분위기는 다시 활기를 띠었고 거듭된 실험과 토론 끝에 역발상이 나왔다. 가루 상태의 철을 단단히 뭉쳐주는 HCI(Hot Compacted Iron)라는 설비를 만들 때 외국 전문가의 조언과는 반대로 설비 재질을 강화하기보다는 무른 재질로 시험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었다. 현장 담당자의 아이디어를 작업팀이 채택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때를 회상하는 사람들은 “정확히 누가 처음 제안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말은 한 사람 입에서 나왔지만 사실은 모두의 머릿속에 그 아이디어가 맴도는” 수준이었다고 말한다. “내 아들의 죽음이 의미 있으면 된다”며 장례비 협상을 모두 맡기고 떠나간 아버지와, 그 죽음이 헛되지 않게 밤낮으로 실험과 토론을 거듭하면서 고정관념을 넘어선 팀원의 헌신적인 노력이 만든 쾌거였다.
파이넥스 공법의 성공 요인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첫째, 분명한 비전 제시와 일관된 정책 추진이다. 초기 단계부터 K 사장 등은 원료와 공해 문제를 혁신적으로 개선할 신공법의 가치를 인정하고 불확실한 상황에서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외신 기자의 지적처럼 일본은 성공이 보장되지 않는 사업에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 붓는 리스크 때문에 뒷짐을 졌는데 포스코는 위험을 감수하며 새로운 길을 열었다. 이 기술을 개발하면 회사에 가치가 있고 나라에 도움이 된다, 이것은 숙명이라면서 난관을 돌파한 리더의 투철한 사명감과 경영층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지원한 회사 차원의 성공 의지 역시 중요했다.
둘째, 솔선수범하는 조직문화다. “정말로 어려울 땐 기교로 버틸 수 없습니다.” 포스코의 J 상무보는 가장 힘들었던 때를 회고하면서 목표는 분명하지만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리더의 존재가 큰 힘이 되었다고 말했다. 너희들 고생하는 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며 다독이는 공장장이 있었다는 직원들의 말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부단히 연구하는 최고지도자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분은 지시를 받고 우리에게 지시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연구해서 나온 결과로 우리를 지휘했다”는 공통된 술회처럼 파이넥스의 지도자는 부단한 학습과 연구로 구성원의 신뢰를 얻었다.
연구자료-교육 콘텐츠로 활용 가능
올해 초 미국 GE의 관계자는 “한국 기업을 배우러 왔다. 그러나…”라며 말끝을 흐렸다. 세계적인 금융위기 속에서도 빠른 회복과 놀라운 성장세를 보인 한국 기업의 동력을 배우러 왔지만 정작 배워야 할 점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말이었다.
현대 한국의 놀라운 성장과 발전을 배우러 오는 이는 GE 관계자뿐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에 유학 온 많은 외국 학생은 정리 안 된 한국 현대사의 사료와 교육과정의 허술함에 실망하곤 한다. 과거 사례의 충실한 축적과 새로운 실험정신, 거기서 나온 성공조건을 기록하고 인쇄하여 널리 소통시켰던 세종의 일하는 방식에 비추어 볼 때 부끄러운 일이다. 파이넥스의 사례가 모델이 되어 한국 기업의 성공 과정을 실록화하는 일이 본격화되기를 기대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