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창혁]성희롱 건배사에 관한 小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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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1월 10일 03시 00분


오늘 도착하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자기 이름이 한국에서 건배사, 그것도 ‘성희롱 건배사’로 외쳐진다는 걸 알까. G20 때문에 경황이 없어서인지 주한 미 대사관 사람들은 잘 모르는 듯했다. 아마 안다면 무척 불쾌하게 생각할 것이다. 사실 필자도 경만호 대한적십자사 부총재의 ‘오바마 건배사’ 보도를 보기 전까지는 몰랐다.

적십자사 부총재를 겸하고 있는 경만호 대한의사협회장은 얼마 전 이산가족 상봉 기자간담회에서 “요즘 뜨는 건배사 중에 ‘오바마’가 있다. 아시느냐? ‘오빠, 바라만 보지 말고 마음대로 해’라는 뜻이다”라며 ‘오바마’를 외쳤다고 한다. 그는 설명을 마친 뒤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연방 웃음을 흘렸다고 참석했던 기자들은 전했다.

경 회장의 발언은 필자가 평소 가지고 있던 경험칙 하나를 재확인시켜줬다. 뭐랄까, 방귀깨나 뀐다는 사람들의 성희롱 발언이나 성폭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떤 경향성 같은 게 발견된다는 얘기다. 영국의 경험론을 완성한 데이비드 흄(1711∼1776)은 우리가 필연적 인과관계에 있다고 생각하는 현상이 사실은 유사한 관념(인상), 시공간적으로 근접한 관념의 우연한 결합일 뿐이라고 인과율을 부정했지만, 그런 경험론 이상의 어떤 필연적 경향성이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해왔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사건을 겪었다. 특히 정치인, 관료가 많았다. 그만큼 케이스가 많았다. 나름대로 분석을 시도해 볼 만큼 데이터가 ‘축적’돼 있다는 뜻이다.

우선 떠오르는 건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정치를 시작한 사람들에겐 별로 그런 경향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흔히 한나라당을 ‘성희롱당’이라고 하지만, 한나라당 안에서도 김영삼 상도동계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정치인들이 경만호류의 건배사나 성희롱을 주워 담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민주화 투쟁과 야당 생활을 거치면서 ‘오바마’ 같은 고급스러운 건배사를 할 만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진보적 가치의 멍에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건 정권을 잡고 나서도 딴건 몰라도, 그런 면모만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의 갈래는 군사정권의 후예들이라고 해도 주역들보다는 조역들, 특히 검사, 변호사, 관료같은 조역들과 권부 주변을 맴돌며 부스러기를 노리는 권변족(權邊族) 사이에 그런 입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한 다리, 두 다리 거쳐 권력과 공생의 연(緣)을 맺고 있는 권변족은 출신도 다양하고, 숫자도 적지 않다. 그들은 그런 허섭스레기 같은 건배사가 자기 인격을 비루하게 만든다는 사실조차도 모른다. 왜 그럴까?

혹시 권력문화가 유별난 한국사회 특유의 자기소외(自己疏外)와 물신(物神) 현상 아닐까? 모르겠다. 3년 전 아프가니스탄에서 피랍됐다 43일 만에 생환한 여성 봉사단원들을 향해 “그 ×들, 공항에 도착하면 산부인과부터 보내야 돼”라고 내뱉는 자칭 보수 권변족 앞에서는 분노보다 깊은 연민을 느꼈다. 그 개인의 인격 문제라기보다는 소외의 극단적 형태를 봤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좋은 건배사도 많다. 올해 식목일. 서광주세무서 김형욱 서장은 직원들과 함께 청사 주변의 쓰레기와 낙엽을 치운 뒤 산수유 10여 그루를 심었다. 그리고 “스페로 스페라(Spero Spera)”라고 외쳤다. 라틴어 ‘Dum spiro, spero(숨 쉬는 한 희망은 있다)’에서 나온 구호다. 죽은 땅에 희망을 심자는 작은 외침이다.

너무 고상하다 싶으면 ‘삼고초려’는 어떤가? 스리고를 외치기 전에 초단을 조심하라는 건배사다.

인생엔 그래야 할 때가 많지 않은가.

김창혁 교육복지부장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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