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칼럼]새 문화부 장관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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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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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의 문화 분야 업적은 상대적으로 덜 조명돼 있다. 박 대통령 시절 정부 부처의 국장급 가운데 대통령에게 면담 신청을 하면 곧바로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두 개 있었다. 재무부 이재국장과 문화재관리국장이었다. 이재국장은 나라의 빈 곳간을 채우는 담당 책임자였고 문화재관리국장은 문화재 보호와 전승 업무를 맡고 있었다. 장관이라도 대통령을 바로 만나기가 쉽지 않지만 이들 국장은 수시로 독대(獨對)가 가능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이 국정의 중심을 경제와 문화에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박 대통령은 1961년 집권 직후 문화재관리국을 신설했고 이듬해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했다. 문화재보호법을 근거로 이때부터 인간문화재가 탄생했다. 문화를 담당하는 정부 부처가 따로 없던 시절이었다. 정부 부처 가운데 ‘문화’라는 간판을 내건 문화공보부는 1968년 출범한다.

정권의 책무 ‘정신·가치 바로잡기’

당장 먹고살기도 힘든 형편에 박 대통령이 어떤 연유로 문화에 그토록 관심을 가졌는지 언뜻 이해하기 어렵다. 1963년부터 문화재관리국에서 근무했던 정재훈 전 문화재관리국장은 담당 계장으로 박 대통령에게 자주 불려갔던 사람이다. 그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우리가 경제발전을 하려면 일본과 관계 개선이 불가피한데 그에 앞서 우리가 반드시 지녀야 할 것이 정신적인 의식이다. 국민이 우리 문화와 역사 유산의 우수성을 잘 알아야 한다. 또 일본이 우리를 침략한 역사적 교훈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고 자주 말했다.

이 증언에서 박 대통령이 민족 문화를 강조했던 이유가 드러난다. 일제 지배를 거치고 설상가상으로 6·25전쟁까지 겪은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자신감과 문화적 자부심이었다. 박 대통령이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을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선 것도 역사적 교훈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문화를 통해 나라의 정신을 세우려 했던 것이다. 이를 놓고 여러 비판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그 시대 상황에 맞는 타당성을 지니고 있었음을 오늘날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0년 좌파 정권 이후에 취임한 이명박 대통령은 우리 사회의 정신적 측면에서 박 대통령 시절 못지않게 책무를 지닌다. 지난 정권에서 한국의 근현대사는 부정됐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산하기관에도 대한민국에 반감을 가진 세력이 진출했다. 이들은 국가정체성을 훼손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현 정부 출범 이후 계속되고 있는 우리의 내부 갈등과 대립은 출구를 찾아내기 어렵다. 생각은 달라도 최소한의 공동체 의식은 공유하고 있어야 하는데 과연 그런지 의문이 들 지경이다. 지난 정권이 남긴 어두운 유산이다.

우리 사회가 더는 혼돈에 빠지지 않도록 공통의 정신과 가치를 고양(高揚)하고 국가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 현 정부에 맡겨져 있다. 그 책임이 큰 만큼 정부 내 담당부처인 문화부의 어깨도 무겁다. 현 정권이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2013년 2월까지 개관하기로 한 것은 이런 시대적 요구에 부합한다. 대한민국이 성장해온 과정을 있는 그대로 국민에게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실망스럽다. 용지가 6435m²(약 1950평)에 불과한 구 문화부 청사를 리모델링해 만드는 것이라 전시 면적이 3300m²(약 1000평)가 채 되지 않는다. 다사다난했던 산업화와 민주화의 전체 모습을 보여주기에 크게 부족하다. 건립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출발점을 놓고도 문화부는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추진력과 비중 있는 후임 찾아야

문화부가 해야 할 일은 많다. 세계화 시대에 더 절실해진 한국 고유의 정신과 문화를 키워나가야 한다. 지난 정권 때 왜곡됐던 문화의 물줄기를 바로잡는 일도 시급하다. 문화부 업무 가운데 관광 분야는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는 만큼 적극 챙길 필요가 있다. 하지만 정부는 별 인식이 없는 듯하다. 차기 문화부 장관 후보였던 신재민 씨가 올해 8월 낙마한 이후 후임 임명이 3개월 이상 지연되고 있다. 유인촌 장관은 얼마 전 국회 답변에서 “장관 오래 하지 않는다”는 발언으로 도마에 올랐다. 문화부 업무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말도 들린다. 장관의 조직 장악력이 떨어진 와중에 문화부가 맡고 있는 템플 스테이 예산이 국회 처리 과정에서 축소 통과되는 일도 벌어졌다.

문화선진국들은 문화부 장관에 강력한 추진력과 비중 있는 인물을 내세운다. 올해 6월 새로 집권한 영국의 보수당 자민당 연합 정권은 제러미 헌트 새 문화부 장관을 임명해 문화정책의 방향을 크게 바꿨다. 프랑스의 드골 정권이 소설가 앙드레 말로를 10년 동안 문화부 장관으로 장기 재직시키면서 문화국가의 위상을 높였던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역시 문화가 경제 못지않게 부각되는 시대를 맞고 있다. 정부는 후임 문화부 장관 임명을 서둘러야 한다. 현 정권에 주어진 시간은 2년 남짓뿐이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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