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유윤종]2010년 베들레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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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2월 24일 03시 00분


연말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떠올리며 세상의 평화를 기원하지만, 막상 그곳을 찾아가는 길은 그다지 평화로운 풍경이 아니었다. 올해 9월, 예수 탄생지인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이었다.

예루살렘에서 8km 떨어진 베들레헴은 무슬림 지역인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에 속해 있다. 도시 바로 앞에는 유대인 거주지역과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을 가르는 장벽이 쳐져 있다. 높고 육중한 회색 담장과 이중 장벽으로 이루어진 검문소는 ‘철옹성’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았다. 무장 군인이 버스에 올라타 날카로운 눈빛으로 일일이 여권을 들여다보았다. 장벽을 지나면 바로 눈앞에 나타나는 언덕이 베들레헴이다. 인류의 정신사와 현실 역사에 거대한 영향을 끼친 주인공의 탄생지에 왔다는 감상과 함께, 어린 시절부터 많은 기쁨을 주었던 성탄절의 고향이라는 생각도 머리를 스쳤다.

베들레헴 시내 예수탄생교회의 제단 아래 계단으로 내려가면 각 종파가 소유한 11개의 은제 램프가 있다. 예수 탄생 장소의 표식도 종파에 따라 몇 걸음씩 다른 장소에 있다. 긴 역사가 흐르는 동안 여러 종파가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 짜낸 지혜의 결과일 것이다. 교회 앞의 널따란 광장은 성탄이 다가오면 세계 각국의 중계차들로 북새통을 이룬다고 했다.

버스를 타고 다시 장벽을 통과하면서 머릿속에선 한 가지 질문이 지워지지 않았다. 세계의 정신적 지형에 결정적 역할을 한 존재의 탄생지 바로 앞에 문명 사이의 충돌을 나타내는 거대한 장벽이 있다는 것은 전능자의 어떤 뜻이 작용한 결과일까. 감히 그 큰 뜻을 헤아릴 수는 없지만 인류는 어떤 몰이해와 갈등 속에서도 결국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그곳에서 기자는 고국을 생각했다. 한때 세계의 변방이었던 한반도는 묘하게도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혜택을 누리며 번영하는 국가와 기묘하게 변형된 스탈린주의 국가가 대치하며 세계 정치사의 모순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땅이 되었다. 검문을 거치면 통과할 수 있는 이스라엘의 장벽과 달리 이 땅의 장벽은 이산(離散)의 철옹성이 되고 말았다. 한반도에 그어진 장벽 또한 전지자의 뜻을 나타낸다면 그것은 무슨 뜻일까.

새해에는 세계의 오랜 분쟁지역에서 지혜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년 8월 서울에서는 유대인과 아랍인 단원들로 구성된 ‘웨스트이스턴 디반 오케스트라’가 내한공연을 갖는다. 유대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과 팔레스타인인 학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1999년 문명 간 공존과 평화를 호소하기 위해 창립한 관현악단이다. 이들은 나흘 동안 베토벤 교향곡 9곡 전곡을 공연하는 대형 프로젝트를 펼친다. 마지막에 연주할 곡은 “환희여, 너의 마법은 관습이 준엄하게 갈라놓았던 것을 한데 묶는다… 백만인이여 서로 껴안으라”며 인류의 하나됨을 호소하는 9번 교향곡 ‘합창’이다.

이 악단에도 세계의 가장 첨예한 분쟁지역으로 부각돼온 한국에서의 첫 공연이 예사롭지 않을 것이다. 먼 길을 오는 만큼 이번 기회에 이들의 연주가 북녘에도 울려 퍼질 수 있다면 어떨까. 북에 가기가 용이하지 않다면 북쪽이 바라보이는 휴전선 인근에서의 연주라도 추진됐으면 싶다. 세계인이 그 연주 장면을 본다면, 그것은 한 분쟁지역에서 다른 분쟁지역으로 찾아온 음악가들만의 행사가 아니라 관습과 이념, 체제의 모든 장벽을 허물기 바라는 인류의 가슴에 잊을 수 없는 사건으로 각인될 수 있을 것이다.

유윤종 문화부 차장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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