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 진화론의 열렬한 옹호자로 주로 알려진 토머스 헉슬리는 1825년 런던 근교에서 사립학교 교사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정규교육의 기회가 많지 않았던 헉슬리는 타고난 근면함과 재능을 발휘하여 포브스를 비롯한 유력한 신사 과학자들의 후원으로 성공적인 과학지식인의 길을 걷는다. 당시 영국의 과학계는 독자적인 경제력을 갖고 과학 연구에 몰두했던 다윈과 같은 신사 과학자가 주도했다.
헉슬리 자신은 신사 과학자의 후원에 힘입어 연구자로 성장했지만 해양생물학에 대한 전문 연구와 함께 신문 기고와 행정 자문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헉슬리는 국가가 주도하는 교육과정의 내용처럼 빅토리아 영국사회의 주요 사회적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문화와 교양으로서의 과학을 강조하는 일관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이처럼 과학지식인으로 수많은 일을 했던 헉슬리는 제한적이고 기능적인 느낌을 주는 과학자로 불리기를 거부했다.
헉슬리의 손자로 ‘멋진 신세계’를 쓴 올더스 헉슬리는 할아버지의 문학적 소양을 강조하곤 했다. 실제로 헉슬리는 바람직한 과학과 문학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엘리엇, 아널드 등 당대 문인과 논쟁을 벌였다. 당시 과학 교육은 오직 기술적으로 응용되어 얻을 수 있는 유용성만을 목적으로 시행됐다. 교양 교육이나 문화의 영역은 고전과 문학이 주도했다.
헉슬리는 이에 맞서 실용적 기술교육이 이뤄지는 광산학교 같은 곳에서도 과학교육이 왜 그 자체로 중요한지, 그리고 왜 과학교육이 고전교육이나 종교교육만큼이나 보편적 가치를 갖는지를 런던교육위원회 활동과 여러 신문기고를 통해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헉슬리는 성경을 교육에 활용하자는 제안에 찬성했는데 얼핏 보기에는 종교에 공공연히 전쟁을 선포한 사람답지 않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헉슬리는 종교가 윤리 교육에 가지는 중요한 가치를 인정했다. 특히 그는 사회가 성공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각 계층의 사람이 자신의 본분을 지키며 공익을 증진시킬 윤리적 태도를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헉슬리는 이를 위한 윤리적 덕목을 고양하기 위해서는 자연적 인과 작용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헉슬리가 찬성한, 종교에 기반을 둔 윤리교육은 영성이나 설교자의 주관에 좌우되지 말아야 했다. 헉슬리는 학생이 성경이라는 구체적인 텍스트에 과학적 분석을 적용하여 성경에서 믿을 만한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을 가려낼 수 있기를 희망했다. 이 생각은 다른 교육위원의 지지를 받지 못해 정책에 반영되지 못했지만 우리는 헉슬리가 당시 주어진 조건에서 과학을 문화와 교양교육에 나름대로 위치시키려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헉슬리가 빅토리아 영국사회에서 과학지식인으로 활동했던 상황과 현재 우리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 하지만 과학과 인문학 사이의 관계, 문화로서의 과학의 지위, 바람직한 과학교육의 내용과 형식, 과학지식의 권위와 한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최근 논쟁은 헉슬리 시대의 그것과 닮은 점이 있다.
헉슬리가 자신의 시대에서 추구했던 것은 문화로서의 과학이 전통적인 인문학과 더불어 ‘한 문화’로서 교육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헉슬리는 과학지식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했지만 과학만으로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편 헉슬리는 과학교육이 왜 필요한지 자체를 논증해야 했지만, 현재 우리는 이미 중요하다고 인정되는 과학교육에 무엇을 담는 것이 더 바람직할지를 고민한다. 답은 전문지식으로서의 과학과 문화적 현상으로서의 과학을 동시에 아우를 내용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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