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혜숙]로봇박사의 죽음이 던진 질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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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13일 03시 00분


“죽을 만큼 힘든가요?” 현재도 대학교 화장실 칸마다 붙어 있는 상담 안내 스티커를 처음 보았을 때 병원 화장실의 장기매매 스티커를 떠올리며 놀랐다. ‘죽을’이라는 단어가 지나치다는 생각도 한순간, 학교 나름의 애절한 노력에 묘한 안도감까지 느낀 적이 있다. 초중고교생이나 대학생을 막론하고 우리 학생들은 그만큼 힘들다.

전문계고 출신으로 로봇박사라는 화제 속에 이공계 명문대에 합격했던 대학생의 자살 사건을 접하며 부모의 아픔을 부모의 한 사람으로서 공유한다. 천재나 영재를 좌절시키고 자신과 타인 생명의 가치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가정과 학교 교육의 현실에 절망스럽기까지 하다. 공고생 로봇박사, 입학사정관제, 전문계고 출신의 명문대 입학, 영어 강의, 학업 좌절감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대학교육의 몇 가지 측면을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우선 대학의 학생 선발 방식이 제대로 가는가에 대한 반문이다. 입학사정관제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과거에도 지역균형선발, 농어촌전형 등 다양한 형태의 특별전형이 있었다. 숫자가 상대적으로 미미해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생을 선발하는 제도는 기회 제공의 공정성을 높일 뿐만 아니라 대학 교육의 발전을 위해서 바람직하다.

그러나 입학사정관제를 통해 증가할 학생들의 학업 수준이 대학교육에 미칠 영향에 대한 점검이 필요한 시점에서 이번 사건이 발생했다. 입학사정관제는 한 줄 세우기 경쟁을 지양한다는 좋은 취지로 시작한 만큼 이번 사건과 인과관계를 지어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다만 공정성, 전문성에 대한 신뢰가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고 무엇보다도 충분한 검증과정 없이, 대학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도입된 제도가 아니라는 점에서 부작용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국민기본 공통교육을 담당하는 고등학교까지와 달리 대학교육은 경쟁과 수월성 추구가 중요하다. 그래서 고도의 아카데미즘을 추구하는 연구중심대학 교육중심대학 전문대학으로 분화 발전하는 방향이 불가피하다. 미적분을 배우지 않은 전문계고 학생이 연구중심대학의 학업을 따라갈 수 있을까. 답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지극히 어렵다는 사실이다. 자살에 이르지 않는다 해도 학생의 성장과 대학교육의 발전에 긍정적이지 못하다. 차제에 학생과 대학의 특성을 고려한 타당한 학생 선발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개별 대학이 자신의 특성에 맞는 선발방식을 찾도록 진정한 자율을 주는 것이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다.

한편 대학교육의 내용과 방법을 생각해 보자. 변하는 학생 선발방식에 부응하여 교육내용과 방법 역시 변하고 있는가, 입학시킨 학생의 교육을 위한 책임 있는 역할을 수행하는가도 짚어보아야 할 대목이다. 대학 당국은 이제 막 수준별 교육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구성원이 수준별 대학교육의 필요성을 공감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가 하면 진정한 교육적 고민 없이 강제되다시피 하는 영어 강의의 타당성 문제도 제대로 검토하지 못하는 것이 대학교육의 오늘이다.

연구를 강조하는 풍토에서 교육도 잘하는 두 마리 토끼를 교수들은 과연 잡을 수 있을까. 한마디로 교수도, 학생도 유행처럼 번지는 제도 변화의 홍수 속에서 제대로 준비되지 못한 채 방황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구나, 그것도 고교 졸업 후 바로 대학에 가는 현실이 바람직한가. 모두가 명문대학이라고 불리는 연구중심대학을 지향하는 현실은 어떤 문제를 야기하는가. 이번 사건은 대학교육에 대해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김혜숙 연세대 교육학부 교수 교육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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