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시드니 올림픽 여자 마라톤. 다카하시 나오코 선수는 일본 여자 육상 최초로 금메달을 딴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당시 올림픽 현장을 찾아가 보고 느낀 것을 책으로 쓰면서 한 영웅의 탄생보다 등수 밖으로 밀려난 선수에 더 주목한다. “나는 승리 이상으로 ‘깊이’를 사랑하고 평가한다. 인생에서 필요한 것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후회 없이 싸우는 것이다.”
작가에 따르면 깊이란, 각기 약점을 안고 사는 인간이 약점에 발목 잡히지 않고 자신을 더 높은 곳으로 이끄는 과정에서 얻어진다. 수시로 손을 베고 잘 넘어지고 뭘 새로 배우려면 삼세번 반복해도 부족한 나처럼 치밀하지 못한 사람은 이런 말에 귀가 솔깃해진다.
‘몸이 서툴다 사는 일이 늘 그렇다/나무를 하다 보면 자주 손등이나 다리 어디 찢기고 긁혀/돌아오는 길이 절뚝거린다 하루 해가 저문다’(박남준의 ‘흰 부추꽃으로’)
새로 마련한 스마트폰을 요령부득인 채 쓰다듬고 있지만 지인들이 애플리케이션에 올린 메시지는 그래도 위안이 된다. ‘당신은 이미 충분히 훌륭하다.’ ‘현명한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닮는다.’
여성화가에게서 인상적인 얘기를 들었다. 자신의 목표는 “화단에서 1인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 자가 되는 것”이란다. 그의 맑은 눈빛에서 패배주의와는 거리가 먼, 묵직한 자존감과 용기가 엿보였다. 학교에선 1등을 강요하고, 사회에서도 1인자가 되기를 채찍질하는 한국 사회. 승자가 되어 모든 것을 독차지하고 싶다는 욕망, 나 아닌 사람이 그 목표를 이루고 성과를 독식하면 견딜 수 없이 솟아나는 질시. 쌍생아와도 같은 상반된 감정으로 이 땅에는 언제부턴가 온갖 막장 드라마가 줄줄이 연출되고 있다.
하루키는 ‘인간이 42킬로미터를 뛴다’는 사실에 감동한 시대를 지나 날로 속도경쟁으로 치닫는 마라톤 경기를 언급하며 “이것은 바람직한 진화일까?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이 질문은 삶의 완주에도 적용될 것 같다. 누구의 삶도 모방하지 않고 아무도 나를 흉내 낼 수 없는 삶을 사는 것. 부족하든 넘치든 있는 그대로 나에게 의지해 일생을 사는 것. 그것으로도 충분히 멋진 인생 아닌가.
살면서 경쟁은 피할 수 없고 그 과정에서 이기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그렇다 해도 1인자가 못되면 삶에서 패배한 것이라는 사회의 암묵적 가정은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돈과 지위라는 성공의 외형적 척도만 알고, 눈에 보이지 않는 내 안의 소중한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삶은 행복하지 않다. 1등을 제외한 나머지는 불행을 느껴야 하므로. ‘행복’이란 꽃말의 세잎 클로버를 밟고서 ‘행운’을 상징하는 네잎 클로버를 찾아 헤매는 안목으로 내 삶을 온전히 즐기고 사랑하기란 힘들 것이다. 경쟁의 승리는 로또 당첨 같은 행운이므로. 반면에 스스로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음미하는 행복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열린 길이다.
철학자 탈레스는 자신을 아는 일이 가장 어렵고 다른 사람에게 충고하는 일이 가장 쉽다고 했다. 이제부터라도 본래 내 모습, 고유한 삶의 무늬를 찾고 싶다. 인생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나’로 성숙하는 과정이자, 자기 안의 신성을 찾아가는 여정이라 생각하면서.
‘나의 신은 나입니다. 이 가을날/내가 가진 모든 언어로/내가 나의 신입니다/…/새 별 꽃 잎 산 옷 밥 집 땅 피 몸 물 불 꿈 섬/그리고 너 나/이미 한 편의 시입니다’(문정희의 ‘사람의 가을’)
궁극의 목표는 1인자가 되는 것인가,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인가. 선택이 있을 뿐 정답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선택에 따라 어떤 노고를 감내하고, 무엇을 대가로 치를 것인지는 기억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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