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20세기 한국문학의 축복’ 박완서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월 24일 03시 00분


소설가 박완서 씨는 문단 데뷔 때부터 신선한 감동을 독자에게 선사했다. 1970년 ‘여성동아’ 장편 공모에서 심사위원들이 뽑은 당선자는 한국 나이로 마흔 살인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늦었지만 아름다운 등단을 통해 ‘나목(裸木)’이라는 걸출한 소설을 선보인 신예 작가에게 박수가 쏟아졌다. 독자들도 박 씨의 소설을 통해 각자 자신들의 가능성과 희망을 읽었다.

그는 40년 동안 왕성한 창작열을 과시하면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박 씨는 2009년 서울대 강연에서 “6·25전쟁 때 오빠를 잃었던 깊은 상처가 문학의 꿈을 이어가는 힘이 됐다”고 술회했다. 6·25전쟁의 고통스러운 체험 속에서 “이때 이야기를 잊지 않고 반드시 기억했다가 언젠가는 글로 쓰리라”고 결심했다는 것이다. 작가는 글에 대한 절실한 자세와 놀라운 기억력, 여성 특유의 섬세한 감성으로 다산(多産)의 인기작가 입지를 굳혔다. 장단편 소설뿐만 아니라 에세이 동화 콩트 등 여러 문학 장르에서 독자와 공감을 나누었다.

그의 글에는 소시민의 마음을 다독여주는 따스함과 훈훈함이 있었다. 작품 세계는 자신의 체험을 담은 자전(自傳)소설, 6·25전쟁을 다룬 체험소설, 어머니 등 여성의 정체성을 드러낸 페미니즘소설, 노년의 삶을 묘사한 노년소설 등으로 분류된다. 전쟁이나 여성 등의 소재를 정치, 이념, 체제의 문제로 접근하지 않고 서민의 생활과 일상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과거의 경험을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복원하고 뛰어난 상상력을 보탠 것이 ‘박완서 문학’의 매력이다. 서민은 작가의 소설을 통해 자신들이 ‘소외된 집단’이 아니라 한국사회를 지켜온 주역임을 알고 위로를 받았다.

그는 파란만장했던 ‘20세기의 한국’을 소설 속에 풍요롭게 살려놓았다.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버린 6·25전쟁과 그 직후의 우리 세상을 다룬 작품부터 한국사회의 성장기를 다룬 소설까지 작품 곳곳에 20세기 한국생활사(史)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 박 씨는 선이 굵은 남성작가와는 다른 형태로 우리 문학을 풍요롭게 해준 ‘한국문학의 축복’이었다. 늦깎이로 등단해 80세 현역으로 부단히 진화한 그의 문학세계는 쉽게 포기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많은 사람에게 귀감이 될 것이다. 그가 그제 이승을 떠났다. 작가의 문화적 기여를 높이 평가하며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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