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박혜경]마르지 않는 모성적 포용력… 결코 늙지않을 ‘박완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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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25일 03시 00분


박혜경 문학평론가
박혜경 문학평론가
불과 몇 달 전까지도 왕성한 작품활동을 해오던 작가의 갑작스러운 타계 소식은 한동안 머리를 멍하게 할 만큼 깊은 상실감을 안겨준다. ‘영원한 현역’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언제까지나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질 것 같았던 박완서의 문학세계가 갑자기 종결되어 버린 순간 비평가로서 느끼는 막막함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한국의 비평가치고 박완서의 문학을 한 번이라도 발언하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작가란, 그것도 뛰어난 작가란 자신의 글을 통해 인간에게 주어진 유한한 생명 너머를 살아가는 존재”라는, 몇 년 전 어느 글에선가 썼던 문장이 지금에 와서 새삼 가슴을 친다.

한국문단에서 누구보다도 탁월한 사실주의 문학의 범례를 보여주었던 박완서의 문학은 한국사회를 종횡으로 질주하는 강력한 서사적 에너지의 산실이었다. 종으로는 한국사회의 내부 깊숙이 가라앉은 참혹했던 역사의 상처들을 되살리고, 횡으로는 동시대의 현실 이면에 놓인 세속적 욕망의 메커니즘을 날카롭게 파헤치며 한국사회의 변화에 누구보다 기민하게 대응했던 작가의 작품들은 역사나 정치 등과 관련된 굵직굵직한 소재들을 일상의 생활공간 속으로 끌어들여 구체적인 경험의 질감으로 풀어내는 능수능란한 이야기꾼의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특히 박완서의 소설은 남성작가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져 오던 6·25전쟁이라는 역사적 소재를 여성의 시각과 감성으로 쓰인 여성의 이야기로 바꾸어놓음으로써 남성적인 힘의 논리에 바탕을 둔 거시적인 역사해석 뒤에 가려져 있던 개인의 깊고 내밀한 상처를 다양하고도 풍부한 서사적 질감으로 그려 보여주었다.

작가가 여러 곳에서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기질이라고 말했던 풍부한 이야기꾼의 재능은 작가 특유의 거침없고 시원시원한 문체와 더불어 박완서의 문학을, 마치 나이 들어서도 소녀의 웃음을 잃지 않던 작가 생전의 모습처럼, 영원히 늙지 않는 문학으로 만들어 놓았다. 작가의 노년기에 그 정신의 젊음은 세간의 돌아가는 켯속을 명징하고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노년의 혜안과 만나면서 나이 들수록 더 아름다워지는 박완서 문학의 진경을 펼쳐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속악하고 이기적인 욕망의 세계를 신랄하게 까발리면서도 인간의 나약하고 어리석은 삶을 따뜻하게 끌어안는 냉(冷)과 온(溫)의 절묘한 조화는 인간을 욕망의 속물로 만들어버리는 현실에 대한 냉정한 관찰자의 시선과 그럼에도 현실로부터 상처받은 인간의 고통에 깊이 공감하는 작가의 모성적 포용력이 빚어낸 박완서 문학의 마르지 않는 창작의 원천이었다.

작년에 출간된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 ‘못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를 펼치니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영혼이다. 80을 코앞에 둔 늙은이이다. 그 두 개의 나를 합치니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푸른 영혼이, 80년 된 고옥에 들어앉아 조용히 붕괴의 날만 기다리는 형국이 된다. 다만 그 붕괴가 조용하고 완벽하기만을 빌 뿐이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코끝이 시큰하다. 작가의 스무 살은 6·25전쟁이 발발한 해이다.

스무 살에 성장을 멈췄던 작가의 생은 나이 마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생의 또 다른 성장을 시작한다. 작가의 스무 살과 80 사이, 그 세월은 우리가 박완서 문학과 함께했던 세월이자 함께할 세월이기도 하다. 작가는 가도 작가의 작품 속에서 ‘스무 살에 성장을 멈춘 푸른 영혼’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있지 않은가.

삼가 박완서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박혜경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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