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푸디즘(Foodie-ism)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3월 3일 03시 00분


“지금 글로벌 금융위기보다 깊고, 어떤 정치 사회적 격차보다 큰 일상의 지각변동이 서구에서 일어나고 있다.” 미국 후버연구소가 2년 전 이맘때 내놓은 문화진단서 ‘음식은 뉴 섹스인가’의 거창한 서두다. 식욕과 성욕은 없으면 인간의 생존과 번식이 불가능하지만, 무작정 추구하다가는 자신은 물론이고 사회에도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과거엔 성적 태도에 따라 도덕적 평가가 매겨졌다. 먹는 것 가지고는 뭐라 하지 않았다. 요즘은 동성 커플도 개인의 취향쯤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를 놓고는 과거 성적 태도에 대한 잣대 뺨치는 도덕성과 인간성, 가치관과 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추세다.

▷푸디(foodie)란 말은 좋은 음식을 즐기는 정도가 아니라, 먹는 것을 소비나 연구대상으로 보는 사람을 뜻한다. 먹는 행위를 윤리회복 운동이나 아예 이데올로기 혹은 종교 차원으로 올려놓은 것이 푸디즘(Foodie-ism)이다. 육식은 야만적이니 채식을 해야 한다거나, 신토불이 유기농 음식만이 인간과 지구를 구한다고 믿는 것이 대표적이다.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은 어제 “무상급식에선 무농약 이상의 친환경 쌀을 사용할 것”이라며 우리나라 푸디즘의 대표주자처럼 나섰다.

▷농사짓는 사람이면 농약 없는 쌀 재배는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벼는 3번 깎아야 정상적인 쌀이 되기 때문에 일반 쌀도 농약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오리나 메뚜기 농법으로 친환경 쌀농사를 한다 해도 열흘쯤 오리나 메뚜기를 풀어놨다가 농약 칠 때 다시 거둬들인다. 더구나 친환경 쌀은 보통 쌀보다 50%는 더 비싸다. 무상급식 단가 2457원 한도 내에서 친환경 쌀로만 밥을 짓다간 반찬으로는 손가락을 빨아야 할 판이다.

▷한 세대 전, 낡은 양은 도시락 사진과 함께 “오늘은 속이 불편하구나”라는 문구가 쓰인 광고가 심금을 울렸다. 가난한 제자에게 자신이 싸온 점심밥을 먹이려고 선생님은 속이 불편한 척했다는 내용이었다. 지금도 우리에겐 최소한 ‘먹을 것을 가지고 장난치면 안 된다’는 인식의 공감대가 있다. 곽 교육감은 아이들이 먹는 음식에도 이념을 불어넣는 푸디즘에 앞장서고 있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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