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을 강타한 ‘동(東)일본 대지진’. ‘일본 침몰’이란 호들갑이 일견 이해도 갈 만한 규모의 대재앙이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일본 국민을 지극 정성으로 위로하고 지원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모든 국가 대소사에는 대의명분이 있어야 하는 법. 선행을 베풀더라도 그 뜻이 선명해야 함은 상식에 속한다. 오늘의 부박한 친일이 언제 그네들의 고질적인 망언을 만나 내일의 경솔한 반일로 돌아설지 모른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라도 대한민국의 대일원조가 어떻게 자처하고 처신해야 할지 지금 짚어둬야 하지 않을까.
일본 현지 언론이 쓰고 있는 이번 천재지변의 통칭은 도호쿠간토대진재(東北關東大震災). 이 대목에 눈길이 머무는 순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마땅히 떠올려야 할 ‘살인의 추억’이 있을 터다. 바로 1923년 9월 벌어진 ‘관동(關東·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사건’.
일본정부 공식통계로 231명, 일본학계(요시노 사쿠조) 추산 2500여 명의 재일조선인이 자칭 시민 자경단(自警團)에 의해 대지진을 뒤따라온 화마(火魔) 속으로 쓰러져 갔다. 집단적 희생양을 찾아 헤매던 대중적 광기가 일제 치안당국의 간악한 방조하에 저지른 반인륜적 만행이었다. ‘간토’라는 이름이 들어간 또 하나의 일본 대지진을 보며 대한민국 국민의 속내가 복잡 미묘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구원(舊怨)을 곱씹으며 온정의 손길을 거두어들일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88년 전 ‘살인의 추억’이야말로 대한민국 대일원조의 대의명분이 되어야 한다. 적극적인 지원을 통해 악(惡)을 선(善)으로 돌려준다는 처신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이 일본에 급파되는 우리 구조대원들을 이렇게 격려했더라면 어땠을까.
“여러분, 일본 지진 피해자분들을 도와드리고 오세요. 그게 인류애(人類愛)에 입각한 대한민국의 의무, 이웃나라에 대한 따뜻한 정리(情理)입니다. 하지만 다른 원조국과 우리의 입장이 다른 점도 있음을 기억하세요. 그건 바로 간토대지진 때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이 바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때 피해자들의 후손인 여러분이 당시 가해자들의 자손을 돕기 위해 지금 한 많은 바다를 건너갑니다. 바다 건너 그 섬에 가서 당신들이 저지른 만행을 잊지 말라고, 그래서 우리가 왔노라고 떳떳하게 말하세요. 그리고 여러분이 구조할 일본인 한 분 한 분이 그때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인 양 최선을 다해 주세요. 그것이 아직도 남의 나라 구중산천을 떠돌고 있을 우리 조상의 원혼을 위무하는 길, 두 나라 사이 불행했던 한때의 매듭을 푸는 첩경입니다.
끝으로 귀국길 피곤하더라도 꼭 간토대지진 희생자 위령탑에 들러 주세요. 험난했던 한 시대를 살다 한날한시 같이 스러져간 한국인과 일본인 영령께 우리 국민을 대표해서 고해 주세요. 원한을 은혜로 갚았으니 이제 다들 편히 쉬시라고. 그리고 다시는 두 나라 사이에 그런 참극이 되풀이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노라고.”
지금이라도 늦지 않다. 나는 대한민국 대일원조에 이런 적극적인 의미 부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 지구적 차원의 인도적 지원에 앞장서야 함은 물론이다. 나아가 이번 지원을 우리 할아버지들의 처절한 항일투쟁, 아버지들이 그토록 염원했던 극일(克日)이 완정(完整)되는 계기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을 구하는 데 국적은 필요 없다. 그래도 ‘일본’ 사람이기 때문에 더 큰 성의를 보인다는 자처는 필요하다. 그래야 후일 배신감에 서운해 할 일도 없을 터다. 그것이 할 일을 하되 할 말은 하는 대한민국 대일원조의 떳떳한 처신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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