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신문 가디언에 실린 한 아버지의 사진이 생각난다. 리비아 동부 라스라누프의 거리를 돌아다니는 56세 남자다. 목에 건 종이에는 ‘내 아들을 찾습니다’라는 글자와 아들의 사진이 붙어있다.
화물차 운전사였던 그와 28세의 아들은 민주화 시위 초기 거리로 나섰다. 공권력이 이웃을 학살하는 걸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었다. 어느새 반군 병사가 된 것이다.
카다피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아들의 손을 잡고 도망쳤다. 하지만 18개월짜리 아기 아빠인 아들은 “비겁해지기 싫다”며 다시 전장으로 달려갔고 실종됐다. 병원에서 시신을 뒤지면서 그는 카다피군에 잡힌 사람들이 어떻게 처형됐는지를 보고 몸서리쳤다.
“다들 귀가 잘리고 입술이 잘리고 손톱이 뽑혀 있었습니다. 아들이 죽었다면, 그런 식으로 죽음을 맞지는 않았기만을 기원할 뿐입니다. 내가 바란 건 그저 자유였고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바라는 건 내 아들입니다.”
분명 리비아전쟁에는 부족 간 내전의 성격이 깔려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전쟁을 촉발한 시위의 본질이다. 전쟁의 도화선은 2월 15일 벵가지에서 열린 작은 시위였다. 이집트 민주혁명에 놀란 카다피 정권이 인권변호사를 연행했고, 항의하는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분노한 시민들이 무기고로 몰려가면서 무장투쟁으로 이어졌다.
1980년 5월 18일 아침 비상계엄 확대에 항의하는 전남대생들을 공수부대원들이 무차별 구타하면서 5·18민주화운동이 촉발된 상황을 연상시킨다. 당시 광주의 시민군은 대부분 평범한 시민이었다. 만약 5·18민주화운동 당시 외국 언론이 ‘영호남 지역갈등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거나 ‘북한 공작원이 섞여 있다’고 보도했다면 그것이 본질을 얘기한 것이었을까.
리비아 반군이 초심을 잃고 부족 간 암투로 변질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알카에다가 반군 속에서 암약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민주화운동도 100% 순수한 참가자들만으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학생운동 지하지도부의 상당수는 주사파였다. 하지만 6월 민주항쟁을 급진좌파 주도의 민족해방 투쟁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 항쟁의 본질은 무수한 학생이 고문을 받아 숨지고 최루탄에 쓰러지는 걸 보다 못한 동료 학생,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민주화를 염원한 것이었다.
세상에 ‘좋은 전쟁’은 없다. 하지만 덜 나쁜 전쟁이라는 차원에서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정당한 전쟁’의 필요조건인 정의로운 동기, 합법적 수행주체 등의 요건을 리비아 무장투쟁과 유엔 군사개입은 상당 부분 충족하고 있다.
정당한 전쟁과 반란·침략의 경계선은 아슬아슬하다. 반군이 부족 이기주의적 권력욕을 앞세우거나, 다국적군 오폭 등의 부작용이 심해지면 선악의 구도에서 이전투구로 바뀔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순수했던 시위대만 억울한 희생양으로 남게 될 수 있다.
중립적이어야 하는 기자의 신분을 벗어나, 민주화 격동기를 먼저 겪은 사회의 시민으로서 리비아를 지켜보는 심정은 조마조마하고 안타깝다. 매일 전해지는 수십, 수백 명이라는 희생자 숫자가 단순한 아라비아숫자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다 소(小)우주였던 귀중한 인명들임을, 죽음이 두려워 떨면서도 인간적 분노와 정의감에서 떨쳐 일어섰던 생명들임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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