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황형준]FTA 번역 오류 부른 부처 이기주의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4월 9일 03시 00분


황형준 경제부 기자
황형준 경제부 기자
“자유무역협정(FTA) 번역 오류에 대한 책임은 당연히 우리가 져야겠지만 각 부처에서 제대로 협조를 해주지 않은 것은 서운하다.”

얼마 전 한 외교통상부 관계자는 최근 한-유럽연합(EU) FTA 한글본 번역 오류 파문이 불거지자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한-EU FTA에서 밝혀진 번역 오류만 207곳에 이른다. 여기에 한미 FTA와 한-페루 FTA 협정문 번역본마저 오류가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면서 정부는 지금까지 체결한 모든 FTA 협정문을 전면 재검독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하지만 사건 당사자인 외교부와 관계부처들은 물밑에서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행태를 보이며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FTA 협정문은 일차적으로 통상교섭본부에서 한글로 번역한 뒤 각 부처 담당자들이 검토 의견을 내도록 돼 있다. 예를 들어 관세, 서비스 관련 부분은 기획재정부가 맡고 분야별로 농림수산식품부와 지식경제부 등에서 해당 부분을 검토하게 돼 있다. 번역 오류는 체계적인 번역전담팀 없이 촉박한 FTA 추진 일정을 맞추려던 외교부의 실수가 크지만 관련 부처 실무직원들의 무성의한 검토도 일부 영향을 미쳤다는 게 외교부의 주장이다.

하지만 재정부 등 경제부처들은 외교부의 이런 주장에 반발하고 있다. FTA 체결의 공은 외교부가 독식하고, 책임은 공유하자는 것이냐는 성토까지 나온다. 재정부 관계자는 “외교부가 다른 부처로 책임을 떠넘기려는 인상을 받고 있다”며 “성과는 외교부 몫이고 책임은 다른 부처가 가져가라는 얘기”라고 말했다.

번역 오류를 둘러싼 책임공방에는 재정부와 외교부의 자리싸움과 부처 이기주의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다. 1998년 외교부 산하에 통상교섭본부가 만들어지면서 경제관료와 외교관이 섞이고 경제관료 출신인 한덕수 전 국무총리가 수장(首長)이 됐지만 통상 조직을 외교부에 내준 재정부의 불만은 적지 않았다.

국제적인 웃음거리가 된 번역 오류를 놓고 부처들끼리 벌이는 책임 떠넘기기는 볼썽사나울 뿐이다. 이번 사안의 총체적인 관리와 책임은 외교부에 있다. 그러나 외교부의 실수가 있었더라도 담당 부처가 꼼꼼하게 검토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촌극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번역 오류 파문은 공무원 기강의 문제로도 볼 수 있다. 청와대 관계자가 “이번 사태는 외교부만이 아닌 정부부처 전체의 문제”라며 “공직자의 협력과 프로의식이 결여되면서 일이 어긋났다”고 말한 대목에 공감이 간다.

황형준 경제부 constant2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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