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작가와 작품의 상호관계를 일찌감치 꿰뚫어 봤던 독일 낭만파 시인 노발리스(1772∼1801)의 의미심장한 명언으로, 미술의 세계도 예외가 아니다. 작품이 일단 발표되고 나면, 그건 이미 개인의 사유물이 아니라 만인의 공유물로서 작가는 오히려 그 작품의 노예가 된다는 뜻이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해야 하고 작품이 작가까지 대신할 순 없다는 이런 ‘작품 우선’의 관점은 사(私)가 공(公)으로 승화되는 예술만의 특징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의 것’이 돼야 하는 게 예술의 기본 속성이다. 왜 예술품은 ‘내 것’이 될 수 없을까. 특정 소수만의 전유물보다는 불특정 다수의 정서 함양이라는 예술 공공성의 보편적 가치가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중세 몰락의 한 원인도 소수 특수층만 향유한 예술문화의 독과점이었다.
작가 고유의 영혼을 지닌 숭고한 작품이 탈세와 로비 등 검은돈 세탁의 희생양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 중심엔 언제나 중개상(仲介商)인 화랑이 있다. 최근 오리온그룹의 비자금 조성 사건은 단순히 일과성 해프닝만은 아니어서 심각한 문제다. 몇 해 전 어느 외국 작가의 ‘행복한 눈물’은 삼성그룹의 민망한 눈물(?)이 되기도 했다.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미술품을 통한 각종 로비 의혹은 돈에 눈먼 몰지각한 배금주의와 문화예술의 본질조차 모르는 천민자본주의가 낳은 부산물이다.
화랑을 ‘갤러리’라고도 하는 건 속까지 훤히 보이는 밝음 때문이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불투명한 화랑이라면 그건 이미 어두운 ‘철의 장막’이지 화랑이 아니다. 빛을 가린 음지에선 으레 탈법과 부패가 만연하기 마련이다. 세계적 권위를 인정받는 뉴욕현대미술관(MoMA)이 ‘미술관 같은 박물관(Museum)’으로 신뢰를 얻고 있는 이유도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영구 소장품은 물론이고 최근 수집품(Recent Collection)도 그때그때 공개하는 투명한 시스템에 있다. 공개는 필수, 소장은 선택이다. 동네 복덕방조차 사고파는 매물을 공개하는데 하물며 공인 화랑의 거래가 불투명하다면 말이 안 된다.
예술품엔 원래 가격이 없다. 작가의 영혼을 돈으로 환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리 진짜 작품이 드물다 해도, 예술품이 고무줄 늘리듯 작품 가격을 멋대로 조작하는 만만한 대상이 될 순 없다. 미(美)는 그 감성적 속성으로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이 점을 전가의 보도처럼 여기는 추세가 마치 평온했던 바다를 휩쓸 반(反)예술적 쓰나미와도 같다.
검은돈이 춤추는 블랙마켓이 미술시장의 진면목이 돼선 안 된다. 잠깐 새 ‘대박’ 날 작품의 독점에만 혈안이 된 졸부들과 거기 유착해 본분도 잊은 소수 화랑의 뒤안길엔 당장 끼니를 걱정하는 배고픈 작가들이 즐비하다.
채근담에서 ‘산속 계곡은 채우기 쉬워도 사람 욕심은 채우기 어렵다’고 했는데 예술품에까지 탐욕이 이어지니 어이가 없다.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났으므로 “모든 사람이 ‘누구의 것’이란 것조차 모를 정도가 돼야 진짜 예술품”이라는 노발리스의 말처럼, 모든 사람이 작가나 재벌, 화랑보다는 작품 자체에서 깊은 감명을 받는 예술 풍토가 아쉽다. 애호가의 저변 확대와 작품 투명거래에 따른 공정 과세도 궁극적으로는 미술시장의 융성에 이르는 길이다.
모든 예술품은 널리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것일 뿐 소장자가 ‘나 홀로’ 간직해 시세 차익이나 노리는 투기 제물이 아니다. ‘묻지 마! 예술품’에서 ‘우리 모두’의 예술로, ‘소수의 투기’에서 ‘다수의 감동’으로 예술의 제자리를 찾아줘야 할 때다.
예술세계엔 국경조차 없다. 세계 공통 언어로서 누구나 예술을 즐기고 정서적 사유 형식을 체험하는 문화예술의 보편적 가치를 되새겨야 한다. 투기나 탈세를 노리는 졸부들의 예술 ‘안목(眼目)’이 높아질 때 비로소 성숙한 문화 선진 한국도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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