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형삼]잉글리시 페이션트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4월 14일 03시 00분


이형삼 출판국 전략기획팀장
이형삼 출판국 전략기획팀장
중년 남자의 여성 호르몬 분비량을 재는 척도로 신경숙의 소설만 한 것도 없다. 지난 주말 ‘엄마를 부탁해’를 다시 읽다가 ‘몸의 변화’를 실감했다. 꼭 2년 전 코를 훌쩍거리며 읽은 터라 내용을 웬만큼 기억하는데도 눈가가 젖었다. 이런 장면에서다. 중학교를 못 가게 된 시동생이 “형수 형수, 나 학교 좀 보내줘. 내가 평생 갚을게”라면서 매달린다. 형수는 텃밭이라도 팔아 학교를 보내자고 했다가 친정으로 쫓겨난다. 열흘 뒤 형수가 퉁퉁 부은 눈으로 돌아오자 어린 시동생은 자식보다 먼저 달려들며 “형수… 나 학교 안 갈 틴게 인자는 집 나가지 마소”하고는 체념한 듯 눈물을 그렁거린다.

우리네 옛 농촌의 정한(情恨)이 참기름 짜내듯 꾸역꾸역 삐져나오는 이 소설에 미국인들이 감동하고 있다는 소식은 뜻밖이다. 영문판 출판사 관계자는 책을 읽다 “넋이 나가 머리를 쥐어뜯고 울면서 집 안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더는 한겨울 곱은 손으로 홍어 껍질을 벗기지 않고 그냥 토막 쳐 제사상에 올리겠다고 선언한 엄마, 가묘를 세우며 시누이가 “내 아래에 자리 잡으라”고 하자 “죽어서도 고모 심부름하게요?”라면서 눈을 흘기는 올케의 가슴속을 그들이 어떻게 읽어냈을까. ‘원래 영어로 쓴 작품처럼 읽히도록’ 글을 옮겼다는 한국문학 전문 번역가, 번역 후 60여 통의 e메일을 보내 작가를 경악시키며 꼬박 1년을 닦고 죄고 기름칠한 편집자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외교통상부는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문에 200개가 넘는 번역 오류가 나온 것이 △촉박한 시간 △외부검증 부재 △전문인력 부족 때문이라고 했다. 하나같이 ‘엄마를…’의 출간 과정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라 신병훈련소의 ‘오시범 조교’를 보는 듯하다. 남들 소설책 한 권 만드는 것보다 못한 정성으로 나라의 밥줄이 걸린 문서를 만들었다.

한국은 연 15조 원을 영어교육에 쏟아 붓는다. 온 국민이 ‘잉글리시 페이션트(영어 환자)’다. 영어점수가 나쁘면 국문학과도 못 가고, 동사무소 말단 공무원이 되고 싶어도 100분 동안 영어시험을 치러야 한다. 이제 미국 대사관(embassy) 가자는 외국인을 여의도 MBC 앞에 내려놓을 택시운전사는 없다. 그만하면 됐다. 영어에 더 투자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밑반찬’은 웬만큼 깔아놨으니 이젠 ‘선택과 집중’으로 영어 역량의 차원을 높이자는 얘기다. ‘영어공화국’의 외교부에 번역·검독 전담조직이 없고, 그래서 협상담당 직원들이 무급 인턴들과 4개월간 1177쪽의 협정문 번역에 매달리고, 그렇게 허둥지둥 만든 번역문을 예산이 없어 로펌에 검증도 못 맡긴다는 게 말이 되는가.

‘로봇 영재’로 KAIST에 입학한 수재는 로봇 관절 설계가 아니라 영어 미적분 수업 때문에 괴로워했다. 학생들은 “많은 친구가 (영어수업 때) ‘멍’ 때리고 있다” “최고의 강의로 평가받던 수업이 영어강의로 바뀐 뒤엔 그저 그런 수업이 됐다”고 토로한다. 선택과 집중의 실종이다. 2008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일본의 마스카와 도시히데 박사는 영어를 하도 못해 교수들이 영어시험을 면제하고 대학원에 넣어줬다. 논문은 대학 후배가 영역했다. 그런 그가 노벨상을 받으러 가면서 ‘쿨’하게 개념정리를 했다. “영어로 된 물리 용어는 안다. 그러나 영어로 말은 못 한다. 그래도 물리는 할 수 있다.”

이형삼 출판국 전략기획팀장 han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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