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오 특임장관은 국민권익위원장 시절인 2009년 9월 공무원들에게 ‘5000원짜리 점심식사’를 제안했다. 그는 “영세 음식점은 우리가 안 팔아주면 장사할 데가 없으니 거기서 점심을 먹자”고 말했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 민주화 투사였던 이 장관의 발언 취지는 선의(善意)였겠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즉흥적 발상”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상가 임대료가 비싼 서울 광화문이나 강남, 정부과천청사 주변 식당은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도 대부분 5000원을 넘는다.
▷권익위가 그제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기업인 70여 명을 초청한 정책설명회에서 공무원에게 3만 원이 넘는 선물이나 접대를 금지한 ‘공무원 행동강령’의 현실성이 거론됐다. 요제프 마일링거 지멘스코리아 사장은 “한국 공무원들에게 3만 원 정도의 식사를 제공하면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어 기분 나빠 한다”면서 접대 한도를 높일 것을 건의했다. 주한 미국상공회의소 회장을 지낸 제프리 존스 미래의동반자재단 이사장도 “지금보다 현실적인 선물이나 향응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고 가세했다.
▷살림살이가 빠듯한 서민들은 ‘3만 원 접대’에 저항감을 느낄 수도 있다. 채형규 권익위 기조실장이 “국민 정서상 3만 원 이상의 접대는 무리”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선진국 기업들은 외국 공무원에 대한 뇌물 제공은 물론이고 현지 정부가 규정한 범위를 넘는 향응과 접대도 금지한다. 하지만 서울 도심에서 저녁 식사를 하다 보면 ‘고급 식당’이 아니라도 1인당 3만 원을 넘는 일이 드물지 않다. 이번 외국기업인들의 발언도 한국 공무원 비판이라기보다는 접대 한도의 현실화 촉구에 무게가 실려 있다.
▷공무원이 기업인과 함께 룸살롱에 드나드는 것은 용납할 수 없지만 고깃집 같은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기업현실과 애로를 이해하는 것을 나무랄 일은 아니다. 서양에서는 같이 밥을 먹으면 친밀감이 형성되는 것을 오찬 효과(luncheon effect)라고 한다. 식사를 하면서 업무를 잘 협의하면 기업과 국가에 함께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얼마짜리 밥을 같이 먹느냐가 아니라 함께 식사를 하는 과정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부적절한 거래’를 차단하는 일이 중요하다. 공무원 행동강령을 단선적이고 일방적 관점에서 접근하기보다 이상과 현실을 종합적으로 고민하는 균형 있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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